제4부 예수님과 동행하며
  제38장 미국·캐나다 방문 및 세계 대회 참석 보고
  ◈ 6월 1일, 목요일

오늘 비행기를 타는 나의 감회는 이전 어느 미국 방문보다도 크다.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하고 바라던 대로 나의 둘째 딸, 정주가 하버드 대학교에서 신약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되어 그 졸업식에 참석하고자 출국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진영에서 성령론을 가지고 매일 불꽃 가운데서 싸우던 딸에게 나는 하나님의 일은 전진만 있지 절대로 후퇴가 없으니 끝까지 싸우라고 항상 말해 왔는데, 막상 정주의 논문이 하버드에서 통과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아들 영훈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우리는 정주가 얼마나 힘든 싸움을 싸워 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사가 바빠서 잠시도 틈을 낼 수 없었던 아들 김영훈 상무가 미국 자동차 부품회사 방문 예정이 있어 나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갔다. 영훈이는 정주가 학위 공부를 하는 동안 하버드에서 함께 공부하며 논문의 윤곽과 방향에 대하여 끊임없이 토론하고 도와주었다. 컴퓨터와 프린터를 누나에게 생일 선물로 주고 논문에 필요한 책들을 구입하는 등 치밀하게 격려해 왔던 것이다.
그동안 김정주 박사가 돌아오면 거처할 연구소를 직접 수리하느라고 나는 옷을 챙길 시간도 없이 작업복으로 입던 옷을 물에 한번 헹구어 다시 입고 겨우 비행기를 탔다. 잘 수리된 집에 미국서 부쳤다는 3,000권의 책이 다 들어갈 수 있게 하고자 나는 벙거지를 쓰고 3개월 먼지를 먹으며 수고하여 모든 수리가 완벽하게 끝나게 되니 나의 마음이 심히 기뻤다.

뉴욕 공항에는 유엔 주재 한국 대사이신 박쌍용 대사님 내외분이 마중을 나오셨다. 오후만 뉴욕에 머물게 되었다고 하니 “왜 그렇게 잠시만 머무시느냐.”고 섭섭해하시면서 뉴욕 유엔 본관 건물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휴회 중인 유엔 총회장에서 박 대사님의 안내로 단상에 올라가서 기념 촬영을 하고 박 대사님과 함께 그 자리에서 한국이 하루속히 유엔에 가입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이 기도가 응답되어 1991년 8월 안보리에서 한국의 유엔 가입이 통과되니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다시금 감사를 드렸다). 관광 전후로 푸짐한 점심과 저녁을 대접해 주셨다. 저녁 식사를 일찍 끝내고 곧 비행장으로 달려가서 보스턴행 비행기를 탔다. 보스턴에 도착하니 김 박사가 벌써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내 뒤에 숨어 나오는 영훈을 보고는 어머니만 졸업식에 참석하는 줄 알고 있다가, 영훈이까지 와서 참으로 하나님 사랑에 감격해 했다.

◈ 6월 7일, 수요일

오늘은 하버드 기독학생회에서 베푸는 졸업 축하식에 참석했다. 말레이시아에서 온 한 부인의 말이 이번에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는 자기 딸, 폴리안 림은 중학교 때부터 예수를 믿어 지금 MIT에 다니는 동생까지도 전도하였는데, 본인은 불교를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무서워 고통을 당하던 어느 새벽에 갑자기 어릴 때 미션스쿨에서 배운 주기도문 전문이 머리에 떠오르더니 무서움 대신 큰 평안이 와서 자기도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 부인은 내가 가지고 온 절제회 달력을 받아, 말레이시아 본 교회 목사님께 드려 교회에 붙여 놓고 절제운동을 선전하겠다고 기뻐했다. 졸업생들과 동창생들도 절제회 달력을 낱장으로 받아가면서 김영주 화가의 추상화 그림과 그 옆에 쓰인 성구와 밑에 쓰인 절제 구호를 소중히 선물로 받아 갔다.

저녁에는 김 박사의 졸업 축하를 위해서 하버드 기독학생회를 40년간 지도해 오신 짐과 뷰라 교수님 내외가 나와 김 박사, 그리고 김영훈 상무를 자기 집에 초대해서 만찬을 베풀었다. 내가 캠브리지에 도착한 다음 날 이미 나와 김영훈 상무 그리고 김 박사를 페컬티 클럽에 초대하여 점심을 푸짐하게 대접하셨는데, 오늘은 또 그 댁에 초대한 것이다. 김 박사의 논문을 토씨 하나도 빠짐없이 지난 3개월간 읽고 교정해 주셨던 이 교수 내외의 수고는 너무나도 놀라우신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뿐인가! 하버드에서 공부하던 김 박사와 김영훈 상무, 김성주 이사, 삼 남매를 자주자주 불러서 그 댁에서 저녁을 대접하고 기도회를 가지면서 사랑해 준 그 은혜를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그 극진한 사랑이 너무 고마워서 나의 큰딸 김영주 화가에게 부탁하여, 그의 추상화 그림(20호짜리)을 한 장 잘 포장하여 선물로 가지고 와서 오늘 드렸다. 짐 쇼 교수 내외는 초록색 톤의 그 추상화를 감사히 받고는 자기 집의 한 벽을 예쁜 골동품 탁자와 초록색 꽃병으로 장식하고 그 위에 그 그림을 전시하였다. 기도와 찬양으로 이어진 오늘밤은 국경과 인종을 초월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교제의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우리는 함께 하버드 대학에 이미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될 것과 세계에 흩어진 기독교 대학 캠퍼스마다 성령의 역사로 회개를 통한 새 부흥이 일어날 것을 기도했다. 반드시 허락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이 교수 내외는 김 박사의 성령론이 하버드에서 통과한 것이 개인의 승리를 넘어서서, 하버드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승리라고 기뻐하고 있었다.

◈ 6월 8일, 목요일

오늘은 김정주 박사의 졸업식 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함께 졸업식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나는 한국의 졸업식만 생각하여 조그만 규모의 졸업식을 생각했다. 그러나 이상호 박사님의 친절하신 안내로 막상 졸업식장에 도착하니 온 세계에서 모여 온 부모들로 학부형 석은 벌써 만원이었다.
나는 모처럼 귀한 졸업식에 온다고 하얀 모란을 그린 치마저고리에 머리에는 하얀 꽃 장식까지 하여 뒤에 서 있기가 너무 서운했다. 그때 마침 나는 어제 저녁 초대하신 쇼 교수님이 혹시 필요할 때 쓰라고 주신 교수석 좌석권 두 장이 생각이 났다. 아들 김영훈 상무는 2년 전 이 학교를 졸업하여, 졸업식 분위기를 알아서 좀 쑥스러워 했다. 좌석표를 보여주었더니 안내원은 제일 앞 좌석을 가리키면서 길을 비켜 주었다. 홍해가 갈라지듯 졸업생이 갈라서 있는 중앙 길을 따라 제일 앞좌석을 향해 갔더니 나의 흰 모란이 그려져 있는 한복을 보고 졸업생들마다 “pretty, pretty”하고 감탄사를 발하면서 귀빈으로 반겼다. 바로 뒤에 총장과 졸업식 주빈 행렬이 들어옴을 앎으로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영훈과 함께 갔더니, 지정석은 합창대 바로 앞에 있었다. 합창대가 연주하는 찬송가를 들으면서 나는 김 박사가 박사 가운을 입고 신학교 졸업생 선두에 입장하는 것을 감격 가운데 목도했다.

점심 때는 하버드 신학교 교정에서 우리가 초대한 미국 장로 교회 목사님 내외분(Bart Kelso)과 캠브리지 한인 교포이신 지정자 씨 모녀와 함께 김영훈 상무와 김 박사와 함께 식사했다.
단과대학 졸업식은 각 학교 뜰에서 다시 열렸다. 나는 교수석 빈자리에 영훈과 앉았더니, 내가 입은 한복과 머리에 꽃은 꽃 덕분에 나를 젊게 본 한 노 교수가 “당신의 남편입니까?” 하고 아들을 가리키면서 물어 “아들입니다.” 하고 한참 웃었다.
신학교 졸업식에서 박사 학위 수여식은 제일 마지막에 있었다. 자유주의 노선의 신학교 지도 교수가 복음적인 입장을 고수한 정주의 논문을 통과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을 주었던 관계로, 김 박사의 이름을 한참 부르지 않아 혹시 이들이 밤새 또 김 박사를 탈락시키기로 마음이 변하였나 하고 생각하고 있을 때 김 박사가 박사 학위를 받으려고 나오고 있었다. 나는 김 박사가 학위를 수여 받을 때, 일어서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마음껏 쳤다. 지난 8년간 하버드를 선교지라 믿고 와서 오늘 학위 수여식에 참석하기까지 그가 당한 모든 고통과 연단을 알기 때문이었다. 진정 오늘 이 학위는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임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
하버드에서 신약학 박사 학위는 아시아인으로서는 김 박사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는 7개 국어 시험을 통과하여야 하고 그 과정이 참으로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모든 과정을 꿰뚫어 내도록 역사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김 박사가 받은 학위와 논문을 통해서 크게 영광 받으실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나는 김 박사의 학위 수여식을 기뻐했다.

◈ 6월 11일, 주일

오늘은 캠브리지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Brockton에 있는 미주 한인 장로교회인 평화교회에 윤사무엘 목사님의 초대로 절제 설교를 하러 가게 되었다. 아름답고 유서 깊은 미국 동부 소도시에 위치한 이 한인 교회는 미국 교회를 빌려 쓰고 있었는데, 교포들이 30∼40명이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윤사무엘 목사님은 연대 신학교와 장로교 신학대학을 나와서 나의 막내딸 김성주와 동창이었다. 그는 하버드에서 구약학으로 석사를 끝내고 보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하고 있었다.

한인 교회를 방문하여 보니 전도사로 시무하는 신순효 자매는 영락여자신학교 출신으로, 주중에는 직장을 가지고 주말에 교회를 봉사하고 있었다. 내가 오랫동안 영락여자신학교를 후원하고 현재 후원회 부회장으로 있는 관계로, 이 자매가 충성되이 교회를 섬기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기뻤다. 그의 남동생 신광성 씨는 훌륭한 화가로, 예술 사진가로 구원의 확신 가운데 함께 교회를 돌보고 있었다.

오후에는 짐과 뷰라 쇼 교수 내외와 함께 하버드 캠퍼스 비디오 촬영을 했다. 먼저 하버드 동상 앞에서 짐과 뷰라 쇼 교수는 하버드의 유래를 설명해 주었다.
1636년 하버드 목사님이 그의 사재와 함께 서재 5,000권을 기증함으로 시작된 하버드 대학은 조그마한 건물 한 채로 시작하였다고 한다. 외적으로는 지극히 미미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캠브리지를 졸업한 하버드 목사님과 당시 지도자들은 신대륙에 이주한 청교도들이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전통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종교 개혁자 칼빈이 시작하신 제네바 대학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학교의 인장에는 덮인 책과 함께 “진리: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Veritas : Christo et Ecclesiae)"라고 라틴어로 새겨 넣어서, 오직 하나님의 계시로써만 진리가 밝혀질 수 있음을 명백히 했다.
짐과 뷰라 쇼 교수 내외분은 이 학교의 인장에서 지금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가 삭제되어 있고 책도 열려 있는 모양으로 바뀐 것이 인본주의와 이성주의의 영향 아래 하버드가 신앙의 바른 전통을 떠나므로 일어난 것임을 지적했다. 이와 같은 신앙 부재의 하버드가 많은 문제를 가진 것을 체험한 김 박사와 김영훈 상무, 짐과 뷰라 쇼 교수 내외와 나는 개혁신앙의 올바른 부흥이 하버드에서 다시 일어날 것을 위해서 학교 교회를 방문하여 간절히 함께 기도하고 비디오로 기도하는 모습을 찍어 기념했다. 학교 교회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제단에서 김영훈 상무는 이사야 40:15∼17, 27∼31까지를 봉독하고 나는 “거룩한 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Walking with Jesus", "Blessing and Glory"를 불렀다. 찬양은 교회를 가득 채웠고 마지막에는 모두 함께 합창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을 불렀다. 계속해서 우리는 하버드 신학교 교정으로 가서, “주 하나님 크시도다.” 를 부르고 나는 헨델의 메시아 가운데서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렀다.
하버드가 원래 시작할 때 가졌던 비전 곧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다시 온전히 헌신되기를 바라면서, 8년간 기도하며 달려온 김 박사와 40년간 하버드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해온 짐과 뷰라 쇼 교수 내외분의 소원이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함께 김 박사의 아파트에서 손을 잡고 하버드의 신앙 부흥과 모든 세계 기독교 대학의 신앙 부흥, 그리고 김 박사의 논문과 학문이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온전히 쓰인 바 되게 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다.

◈ 6월 12일, 월요일

캠브리지에 머무는 동안 미국 역사의 시작에 있어서 중요한 사적지를 둘러 볼 기회가 있었다. 윤사무엘 목사님의 호의로 청교도들의 배가 처음 정박한 플리머츠 항구를 방문했다. 큰 돌을 주위로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옆에는 그 당시 배 모형이 전시되어 있어 둘러 볼 수 있었다. 배 안에는 당시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구들과 식기들, 침실 등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어 먼바다를 항해 해온 청교도들의 큰 믿음과 노력이 잘 나타나고 있었다. 배 건너편에 있는 초로 만든 기념관에는 청교도들의 초기 정착하는 모습이 또한 잘 재현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의 초인적 용기 뒤에는 당시 부패한 영국 교회 제도를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려는 의지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짙게 깔려 있었음을 볼 수 있었다.

◈ 6월 18일, 주일

평화교회에 주일 낮 설교를 했다. 술과 담배의 해독을 일깨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절제함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자고 강조했다.
설교 후 윤 목사님은 한 집사 내외가 주말에 여행하고 주일 새벽에 돌아와서 교회에 늘 빠짐을 염려하여 함께 심방하여 주일 성수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시기를 부탁했다. 간단한 설교 후에 저들 내외에게 절제 회원이 되라고 했더니, 부인이 남편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 “저 사람이 담배를 안 피운다면 기적이게요.” 한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는 남편 집사님이 절제 회원이 되겠다고 자기 이름을 적어 넣었다. 윤 목사님은 그 집사님이 담배 피우는 줄 전혀 몰랐다고 한다.
현재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 형편을 잘 나타내는 광경이었다. 목사님들은 설교에서 술과 담배, 마약의 해독에 대해서 별로 언급을 안 하고 재직 장립 시에도 주초를 문제 삼지 않으니, 일부 교인들은 거리낌 없이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심지어 마약을 하면서 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이 현상은 반드시 고쳐져야 할 문제임을 절실히 실감했다.

◈ 6월 20일, 화요일

오늘은 윤사무엘 목사님의 안내로 스미스 대학과 웰스리 대학 캠퍼스를 방문하게 되었다. 마침 스미스 대학에는 김성혁 목사님이 교목으로 수고하고 계셔서 반가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스미스 대학이 있는 놀츠 햄프톤은 또한 미국이 낳은 가장 유명한 신학자요 부흥사였던, 요나단 에드워드가 목회하던 교회가 있었다.
오고 가는 차 속에서 김 박사는 내게 요나단 에드워드의 사위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선교 일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 주었다. 1700년 중반 뉴 잉글랜드의 울창한 원시림들 사이로 말을 타고 추위와 가난에도 불구하고 인디언들을 전도하던 청년 선교사의 피를 토하던 기도와 신학교의 냉대에도 굴하지 않고 그의 청춘을 교회의 부흥과 세계 선교를 위해서 온종일 콩죽 한 그릇을 먹고 건초더미 위에서 잠을 자면서, 당시에 동물과 다름없이 취급 받던 인디언들에게 저들의 각종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배워 가면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결신자를 내고 교회를 개척하며, 학교를 세웠던 그의 짧은 생애는 19세기에 미국 대학생들에게 세계 선교의 불을 붙이는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
뉴잉글랜드의 강한 겨울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험했던 박사 과정의 영적 싸움에서 외롭게 싸워야 했던 김 박사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과 힘을 주었다고 말했는데, 같은 감격이 내게 그 이후로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린 웰스리 대학도, 한 유명한 변호사가 외아들을 잃고 회개하고 감리교 순회설교자가 되어 그의 소유였던 아름다운 땅을 하나님께 바쳐서 여성들과 고아들을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미국의 여성 교육기관으로 명문이 되어 있었다.

◈ 6월 24일, 토요일

오늘 오후에는 김 박사의 논문 지도 교수이셨던, 쾨스터 교수의 집에 초대받아 방문하게 되었다. 선물로 가지고 간 넥타이와 칠보 벽 접시를 드리고 다과를 대접받았다. 우리에게 차편을 제공하려고 함께 동행한 윤사무엘 목사님 내외는 쾨스터 교수 부인이 인도한 마드리갈 합창단에 함께 노래한 적이 있어 반가이 인사를 나누었다. 차를 마신 후 쾨스터 교수와 김 박사의 부탁으로 초대한 답례로 내가 “거룩한 밤” 을 불렀더니, 쾨스터 교수 내외, 윤 목사 내외는 함께 4중창으로 “찬양, 찬양, 복되신 구세주 예수”를 힘껏 불렀다. 2년 전 김 박사가 자기와 입장을 달리하여 삼위일체를 믿고, 복음적으로 논문을 쓰고 있다고 더는 봐 줄 수 없다고 하던 교수가 항복하였다고 말하면서, 박사 학위 논문을 마치고 가는 김 박사와 내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으니 어찌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이 아닌가!

저녁때 신순효 전도사님 남매가 초대하여 갔다. 보통 선입견에 전도사님 댁이라고 하면 가난하게 사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대리석으로 장식된 고급 아파트를 남매가 밤낮으로 일하여 번 돈으로 사 가지고 아름답게 살고 있어서 내 마음이 기뻤다.
며칠 후 방문한 윤 목사님은 공부를 하느라고 부인이 아기를 봐 주면서 검소하게 살고 있어서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 6월28일, 수요일

내일은 김 박사가 8년 동안 수고하면서 머물던 캠브리지를 떠나는 날이다. 짐 부칠 것을 마지막 정리하느라고 김 박사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박사는 부잣집 딸답게 모든 짐을 책 이외에는 다 남들에게 주고 오자는 입장이어서 책만 3,000권 한국에 부쳐 놓고 나머지 침대와 책장 부엌 기구 등은 사람들에게 주려고 했다. 그러나 쓰던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어디 그렇게 많은가! 오히려 물건을 일부만 주고 처분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는데, 내가 미국에 도착하여 보니 남은 물건들이 다 한국에서 요긴하게 쓰일 것들이어서 가지고 가자고 설득하였다. 오랫동안 공부하느라고 지쳐 짐을 쌀 힘도 없어 보여 부엌 집기, 스펀지, 쓰레기통까지 다 깨끗이 씻어서 싸 놓았더니 김 박사는 “어머님은 과연 절제 회장님 자격이 있으시네요.” 하고 웃는다(모든 짐이 다 잘 와서 성냥까지 일 년을 쓰더니, 김 박사는 짐 부치는 과정을 보며 내게서 절제하는 정신을 배웠다고 기쁘게 고백한다). 바쁜 중에 내일 떠나는 정주와 나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쥬디에게서 전화가 왔다. 김 박사의 사랑과 대접을 많이 받은 쥬디의 어머니께서 나와 김 박사를 쉐라톤 호텔에 초대하라고 하신단다. 김 박사의 친구들도 초대할 사람이 있으면 꼭 하라고 부탁한다.
전화를 끊자 얼마 후 한 중공 여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학생은 김 박사가 내일 학위를 마치고 캠브리지를 떠나는 것도 모르고 그저 천안문 사태로 마음이 괴로워 위로를 받고자 한 전화였다. 이 중공 학생을 쥬디에게 김 박사가 이미 소개한 관계로 서로 잘 알고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김 박사는 그 친구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였다. 미리 아파트로 중공 학생이 찾아왔는데 나는 중국말을 모르고 그는 한국말을 모르고 내일 떠나는 준비로 김 박사는 바빠 옆에 없어서, 나는 내가 잘 아는 영어 찬송가를 하나씩 그 중공 학생에게 불러 주었다. 원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김 박사에게 들었는데, 정말 내가 부르는 찬송을 듣고 어둡던 얼굴이 점점 기쁘게 밝아 오고 있었다.
얼마 후 쥬디가 와서 우리는 호텔에서 저녁을 맛있게 들었다. 김 박사가 지난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에, 미라나타 교회 브라이언 디버(Brian Diver) 목사님 초대를 받아 이 중공 학생을 데리고 가서 열심히 요한복음 3:16을 가지고 전도했더니 “모택동은 자기를 믿으라고 하고 예수는 자기를 믿으라고 하니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고 할 만큼 아직도 공산주의에 깊이 빠져 있는 학생이었다.

저녁 식사 후 주차장에서 차를 기다리면서 그 학생은 내게 “어머님은 성악 선생님으로, 김 박사는 성경 선생님으로 중공 대학에 초대하겠어요.” 라고 했다. 나는 김 박사에게 “이 학생의 마음 문이 열렸으니 네 아파트로 같이 가서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해주라.” 고 말했다. “같이 가겠느냐.”는 김 박사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기쁘게 응답한다.
아파트에 들어와서 나는 오늘 내가 불러 준 영어 찬송가의 가사를 김 박사에게 하나씩 써 주라고 말했다. "Walking with Jesus", "I will sing of the mercies of the Lord", "Blessing and Glory"를 하버드 350주년 기념으로 출간된 하버드 기독 학생회 신앙 간증집 뒷장에 김 박사는 써 주었다. 그러고 나서 김 박사가 이 중공 여학생에게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를 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진심으로 기쁘게 하겠다.”고 말했다. 2년을 넘게 전도해 온 이 학생의 마음에 복음의 씨가 열매 맺는 순간이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셔 드리는 기도를 간절히 따라 하고 나서 헤어질 때 김 박사가 “오늘 참 국제적인 밤이었지.” 하고 말하니 그 학생의 대답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연합하여서.” 하고 덧붙인다. 김 박사는 그 대답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면서 “제자가 선생보다 낫다.” 고 칭찬했다.
참으로 은혜로운 밤이었다. (이 학생은 일 년 반 후, 1990년 크리스마스에 그동안 신앙의 성장을 자세히 설명하는 편지를 김 박사에게 보내 왔는데, 미국 학생 세계 선교대회인 Urbana에 참석하고 부모와 형제들, 중공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만큼 성숙해 있었다. 대한기독교 여자절제회 후원으로 이 친구 리다는 1992년 여름 스웨덴에서 열린 세계기독교 여자절제회 중국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 7월 1일, 토요일

김 박사가 11년 동안 미국에서 아무 곳도 관광하지 않고 공부만 하였기에 지난 이틀 동안은 라스베가스 힐튼 호텔에 머물면서 그랜드캐년의 장관을 비행기로 구경시키고 오늘은 미국의 또 하나의 국립공원인 요세미티 공원을 함께 관광하고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힐튼 호텔에 도착하니 김박사의 친구 되는 데이비드 에드니 선교사님께서 전화해 달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데이비드 에드니 선교사 내외분은 OMF선교회 선교사님으로 평생을 중국 선교를 위해서 사신 거룩하신 분이다. 허드슨 테일러가 이끌던 OMF의 전신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 일원으로 60여 년 전, 캠브리지 대학 졸업 후 바로 중국으로 건너가서, 공산당 집권으로 중국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선교하시다가, 그 후로 싱가폴에서 DTC(Disciple Training Center)원장으로서 수고하셨고, 은퇴하신 다음에도 Pray for China Fellowship, 그리고 China Aware Seminar, 등을 주관하시면서 계속 일해오고 계시는 귀한 분이시다.

1988년 10월에는, 짐과 뷰라 쇼 교수 내외분과 평생 친구 되신 에드니 선교사님의 부탁으로 하버드 신학교 채플시간을 김 박사가 주선해 드렸다. 에드니 선교사님은 중국 교회의 현재 상황을 하버드에서 증거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중국 가정 교회의 참된 믿음과 성경 말씀을 다 외우고 손으로 써서 책으로 만드는 저들의 열심을 이야기하고 문화 혁명 중에 중국 기독교인들이 보여 준 순교 정신이 오늘 중국 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가지고 왔음을 말하여, 영적으로 혼미한 하버드 신학교에 선교와 믿음의 힘과 중요성을 담대히 증거해 주셨다.
이러한 계기로 김 박사와 잘 알게 된 데이비드 선교사님은 우리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연락하신 것이다. 전화를 드렸더니 내일 선교사님이 인도하시기로 된 중국 교회 아침 청년 예배와 주일 낮 장년 예배 설교를 김 박사를 통하여 내게 부탁하셨다. 나는 중국 교회에 절제 설교를 할 기회를 얻은 것이 기뻐서 쾌히 승낙하였다.
월요일부터 요세미티 공원에 가려고 알아보니, 16시간이 걸려서 가는 버스 편밖에 없어서 김 박사와 나는 하루 동안에 너무 긴 차 여행 왕복은 몸을 상하게 할 것 같아서 요세미티 공원 관광을 포기하고, 대신에 성도들과 내일 교제를 나눈 후 샌프란시스코만 관광하고 일찍 플로리다로 떠나자고 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 7월 2일, 주일

아침 일찍 Berkeley로 출발하여, 에드니 선교사님 내외와 함께 Davis 시에 위치한 중국 교회(위치만니 형제단 교회)에 아홉 시에 도착하였다. 9:15에서 10:15까지 청년들을 위해서 설교 말씀을 나누고 10:30에서 11:45까지는 장년 설교를 했다. 에드니 선교사님께서 부탁하시어 특송으로 “거룩한밤” 과 "Blessing and Glory"를 각각 불러 드렸다.
나는 한국말로 설교를 하고 김 박사는 영어로 통역하면 장년 예배에서 중국 교회 담임 목사님은 다시 중국말로 통역하는 3중 통역의 설교였는데도 설교하는 나에게나 듣는 회중들에게 참으로 은혜가 컸다. 나의 설교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 두고 온 조국, 중국 땅에서 천안문 사태와 같이 무지막지한 살상이 일어나, 자유를 갈구하는 대학생들을 탱크로 깔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듣게 되니 정말로 마음이 아프지요.
여러분! 그러나 용기를 잃지 마세요. 한국이 6·25때 이북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 불바다가 되었을 때, 한국 기독교인들은 낙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나라가 반드시 공산 침략주의를 깨뜨리실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기도하였어요. 그 결과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가 존속하여 오늘까지 교회가 자유를 누리고 있어요.
여러분!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중국 공산당 정부가 회개하도록 기도하세요. 반드시 정의가 이길 것을 믿으세요.
제가 아주 어릴 때 저의 어머니께서는 성경 선생님으로 철야 기도를 항상 하시고 매일 새벽 기도를 드리면서, 전국 방방곡곡에 선교사 일행과 함께 사경회를 인도하시는 귀한 분이셨어요. 그런데 한국 장로교회가 최초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로 이대영 목사님을 파송하게 되었을 때, 선교사님께서 아들을 맡기실 때를 찾자 저의 어머님께서 맡으시어 우리 오빠들과 함께 길러 주셨어요. 중국 선교사의 아들이 함께 거하니 저희 집 가정 예배 시에는 항상 중국 선교를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서, 어려서 부터 저는 중국을 참 사랑하게 되었지요.
여러분! 한국 교인들은 중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중국을 형제와 같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요. 최근 88올림픽에서도 중국이 좋은 성적을 내도록 한국 사람들은 중국을 응원하면서 기뻐하였어요.
중국이 민주화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명을 받으신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고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려면 우리는 술과 담배, 마약의 해독을 바로 알고 이들을 금하여야 하겠어요. 그리고 가정 속에서 자녀들과 남편들이 이와 같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하겠어요. 세계에서 106년이 되고 한국에서 66년 된 이 절제운동은 복음 전도를 통하여 절제 정신을 심는 성령 운동으로 마지막 때 교회에 꼭 필요한 운동이니 여러분들도 이 술과 담배, 마약을 가정과 교회, 국가와 인류로부터 몰아내는데 많이 힘써 주십시오.“

이렇게 설교를 하고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모든 교인들이 손을 잡고 사랑과 기쁨을 나누는데, 그중에서 그 교회의 평신도로 열심히 봉사하시는 Davis에 위치한 California 대학 여자교수인 밍 박사가 에드니 교수 내외와 나와 김 박사를 점심에 초대하였다. 보통 나는 주일외식을 삼가하나, 연로하신 에드니 선교사 내외가 다시 운전하여 갈 거리가 1시간이 넘어서 감사히 점심 초대를 받았다. 그곳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초대한 밍 교수는 우리에게 “요세미티공원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우리 대답이 “그곳을 관광하려고 왔는데 너무 멀어서 포기하고 내일 하루 샌프란시스코를 보고 이곳을 떠날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대답이 자기가 motor home(침대와 부엌, 화장실이 달려 있어, 먼 길을 여행할 때 자면서 갈 수 있는 캠핑용 큰 차)을 최근에 샀는데, 아직 시동도 걸어 보지 않은 새 차라고 한다. 그런데 이 차를 내일 시동을 걸어서 시험하여 이상이 없으면 우리를 2박 3일 일정으로 요세미티에 모시고 갔다 오겠다는 것이다. 그러면 가다가 중간 캠핑 지점에서 자고 다시 가면 천천히 가게 되니 수월하게 다녀올 것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의외의 친절에 어리둥절해 있는 우리에게 에드니 선교사님은 “그 생각이 참 좋다.”고 다녀오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저녁 우리는 에드니 선교사님이 주최하는 중국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한 후, 밍 교수 언니 댁으로 숙소를 옮겨서 이 제안을 받아 요세미티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 7월 3일, 월요일

오전에 샌프란시스코 Redwood를 관광하고 오후에 짐을 정리하여 Berkeley에 있는 에드니 선교사님 댁으로 갔다.
그 댁 바로 옆 교회에서 에드니 선교사 내외분이 인도하시는 중국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여 천안문 사태 때 중국에 머물렀던 교수님과 중국 학생 내외로부터 그곳 상황을 듣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보고하는 분들은 한결같이 참혹했던 천안문 사태가 문화혁명 때와 같이 오히려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특수 계급이 되어 있던 대학생들과 학자들 같은 지식인들이 이후로 교회에 많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보고 후에 뜨겁게 기도하는 미국 교포 중국인들의 모습 속에서 내일 중국 교회의 부흥을 생생히 목도할 수 있었다.

기도회 후 우리는 중국 교회 청년회 대표의 차로 밍 교수님 언니 댁으로 갔다 반기는 언니의 모습 속에서 나그네를 많이 대접하는 성도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언니 이야기가 밍 교수는 어린 나이에 홍콩에서 미국에 왔는데, 고학을 하느라고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날 때도 귀국하지 못할 정도로 어렵게 공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여 기생충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그 분야의 권위자가 되어 교수로서 성공하여, 언니인 자기와 모든 형제들을 오히려 미국에 초대하여 다 정착하게 돕고 지금은 심장병 수술 후 쉬어 가면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큰 집을 가지고 있다가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두 집을 나란히 사서, 하나는 자기 앞으로 하고 하나는 본인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방문한 언니 집은 아주 아름답고 컸다.
밍 교수는 시동을 연습하러 가까운 교외에 낚시를 하러 나갔는데, 내일 아침에 돌아오면 우리와 같이 요세미티로 출발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김 박사와 함께 밍 교수가 심장병 수술을 최근에 한 줄 알았으면 그 초대를 거절하였을 것이라고 말했더니, 그 언니는 최근에도 카리브해에 여행을 다녀올 정도여서 괜찮을 것이라고 우리를 안심시켰다.
교회에서 나의 설교를 듣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진심으로 반겨 나는 국경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볼 수 있었다.
이 언니는 남편과 딸을 사별하고 밍 교수와 함께 교회 생활과 이웃을 전도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있었다.

◈ 7월 4일, 화요일

미국 독립 기념일 오전에 밍 교수가 찾아와서 우리에게 자기의 motor home이 전혀 이상이 없이 가동되더라고 말하면서, 잡아 온 생선과 함께 모든 여행 준비가 끝났다고 알려주었다.
점심을 간단히 먹고 우리는 세면도구만 들고 2박 3일의 여행길에 올랐다.
차의 핸들을 잡고 떠나면서 밍 교수가 내게 하는 말이, “당신은 하나님의 VIP라 정중히 모시겠으니 안심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다.
그는 자기의 부모가 어떻게 철저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이야기하고 여동생의 아름다운 소프라노 독창회 테이프를 틀어 주었다.

반나절을 타고 가서 해 질 무렵 요세미티 바로 근처에 위치한 캠핑 지점에 도착하여 차를 세우고 나가니, 벌써 산바람이 시원하고 옆 에는 물이 흐르고 많은 관광객들의 motor home이 그곳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캠핑 지점에는 수도, 화장실, 간이 판매점 시설이 되어 있어 무척 편리했다. 그날 밤 저녁 식사로 밍 교수는 전날 잡아 온 생선을 중국식으로 튀겨서 우리를 대접했다.

그리고 나서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중에 밍 교수는 자기의 깊은 의문점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이는 그가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게 되니 자기의 아버지도 심장병으로 돌아가신 다음이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보다 어린 밍 교수가 꼭 믿음의 동생과 같이 사랑스러워서 부활의 확신을 가지게 된 나의 체험을 나누어 주었다.
나의 어머니께서 내가 20여 세 때 돌아가셨을 때 경험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귀한 여종으로 평생 말씀을 가르치다가 제단에서 쓰러져서 얼마 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니 그 좋은 천당에 가셨음을 믿게 되어 울지는 않았으나, 왜 그렇게 보고 싶고 허전한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남편이 나에게 “병을 대신 아파 줄 수 없듯이 슬픔도 대신 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고 말해도 내게는 별 위로가 안 되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잠을 자는데, 어머니께서 빛나는 흰 옷을 입으시고 관에서 벌떡 일어나셨다.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일어나세요?” 하고 의아해하는 내게 어머니 말씀이 “아가야! 부활했다. 기뻐해라.” 하시는 것이었다. 잠을 깨 보니 꿈이었다.
꿈을 깨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섭섭해 한 것이 마치 굼벵이가 매미 보고 운 것과 같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이후로 다시는 슬픈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 후 30대 중반에 나는 기관지 확장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1년간 병상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 그때 부활의 확신 가운데 있던 나는 죽으면 천당에 가서 보고 싶은 예수님과 사랑하는 부모님, 먼저 간 성도들을 볼 것을 생각하니 기뻤고, 살면 이 큰집에 사랑하는 남편과 귀여운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 것을 생각하니 기뻤다. 따라서 나의 병상은 하늘로부터 폭포수와 같이 내려오는 평강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때마침 나를 병문안 온 한 전도사님은 내가 남편과 자식을 두고 가려니 너무 슬퍼 미친 줄 착각하고 한참 바라보다가 내가 은혜를 받아 진정 기뻐함을 보고는, 자기의 숨은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내 병상을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이와 같이 부활의 확신을 나눈 다음, 나는 밍 교수에게 “30세에 사형 선고를 받고도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했는데, 60대가 되어 한평생 다 살고 난 지금 갈 길이 가까우니 더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담대히 말했더니, 내 간증이 죽음에 대한 자기의 공포를 몰아내었다고 기뻐했다.
그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나그네 된 우리에게 선을 베풀어 요세미티까지 안내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밤중 요세미티공원 입구에서 그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참된 부활의 확신과 기쁨을 선물로 주셨다.
할렐루야! 오늘은 미국 독립 기념일인데 이날은 또 한 밍 교수에게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을 주신 뜻깊은 날이 되었다.

◈ 7월 5일, 수요일

아침을 먹고 요세미티로 출발했다. 밍 교수는 요세미티에 자주 온 터라 무척 그 고원을 사랑하고 있었다.
오전 중에 요세미티 공원에 들어가니, 돌로 깎아 자른 듯한 절벽과 그 위로 레이스처럼 나부끼는 폭포, 울창한 숲과 맑은 계곡이 어울려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화강암의 웅장한 절벽들 위로 바위를 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움직이는 점과 같이 작게 보였다.
이곳의 아름다움을 나는 한국의 설악산과 비교하여 보니, 설악산이 결코 빠지지 않음을 또한 깨달았다. 그래서 밍 교수에게 한국을 방문하면 이와 같이 수려한 설악산을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오래 자동차를 타고 온 다음이라 밍 교수도 나도, 요세미티의 맑은 공기 가운데 한숨 자고 다시 우리는 캠프 지점으로 돌아와서 온종일 산행을 한 다음에 오는 피곤으로 motor home에서 곧 잠이 들었다.

◈ 7월 6일,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 요세미티를 뒤로하고 다시 Davis 시로 향하였다.
오는 길에 과일 농장에서 과일도 사고 미국 서부의 광활하고 건조한 풍경을 보면서 달리다가 점심을 도중에 있는 작은 도시의 중국집에서 밍 교수가 우리를 대접했다. 오후 일찍 밍 교수 언니 댁에 도착하니 밍 교수의 교회 친구들과 올케가 우리를 반가이 맞아 주었다. 나는 김 박사와 함께 저들 모두들 그곳에 있는 중국 식당에 초대하여 푸짐한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모두 기쁘게 식사를 하고 밍 교수 집으로 돌아와서 찬양을 하면서 과일을 디저트로 함께 먹었다. 이 자리에서 밍 교수와 교회 친구는 내게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평안이 실제인 것을 목도 했다고 이구동성으로 감사하였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밍 교수 집에서 피아노로 우리는 찬양을 부르는데, 나는 “저 건너 편 강 언덕에 아름다운 땅 있도다” 라고 부활의 찬양을 밍 교수에게 불러 주고 한영 찬송가를 기념으로 선물하였다.

◈ 7월 7일, 금요일

아침 일찍 일어나, 다음 행선지인 플로리다로 떠날지, 아니면 행선지를 바꾸어 좀 쉴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날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했다.
당초에 김 박사는 영국 캠브리지 대학의 틴데일 하우스와 독일 튀빙겐 대학의 벵겔하우스를 장래 신학 교육의 모형으로 생각하고 방문하고 싶어해서 나는 졸업 선물로 유럽 여행 비행기 표를 끊어 왔다.
그런데 김 박사와 내가 그동안 하던 일로 많이 피곤해 있어서 막상 긴 유럽 여행길에 나서기보다는, 캐나다 세계 대회가 열리는 8월 2일까지 어디서 푹 쉴 수 있을지 하나님께 기도드리면서 간절히 도우심을 구했다.
밍 교수에게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조언을 구했더니, 여행 경험이 많은 그는 방금 플로리다에서 돌아왔는데 그곳에 범죄가 너무 잦아 본인도 공항에서 전화하는 사이에 지갑을 털려 참 불쾌했다고 하면서, 쉴 만한 곳이 못 될 것이라고 했다. 대신에 밴쿠버로 가면 여름을 조용히 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가신다면 다시 motor home으로 모시겠다고 제안해 왔다. 한국에 전화해 보니 큰딸 김영주 화백도 더운 여름에 긴 여행을 하지 말고 밴쿠버에 가서 쉬라고 권한다.
김 박사는 성령론을 쓴 후, 자기의 모든 계획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하고자 기도하며 인도하심을 구하던 차, 성령께서 성도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 여정을 가르쳐 주심을 믿고 기쁘게 여행 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오전에 Sacramento 공항에 나가 비행기 표를 재발행해 줄 것을 부탁했다.
공항 직원 대부분이 주저했으나, 나의 캐나다 방문 목적이 절제회 세계대회 참석인 것과 유럽 여행 취소가 과로하여 쉬기 위함인 것을 김 박사를 통해서 들은 한 직원이 기쁘게 1시간이 넘도록 새 여행을 계획함에 따라 비행기 표를 수정하여 발행해 주었다.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르게 나는 김 박사와 처음 와 보는 밴쿠버에 앞으로 한 달 간 쉬기로 작정하고 도착하였다. 아는 사람도 없고 미리 연락한 곳도 없으므로 이곳 도심부에 있는 Sheraton Landmark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높은 호텔 객실의 창을 여니 바닷바람이 시원하고 샌프란시스코의 열기와 달리 도시 전체 미관이 매우 한적하여 마음에 들었다.
하나님의 기이하신 인도하심으로, 참으로 오래간만에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하면서 첫 밤을 지냈다.

◈ 7월 9일, 주일

한인 교회에 나가려고 주소록을 통해서 알아보는데, 그곳에 있는 순복음 교회에서 우리를 모시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밴쿠버 교외에 위치한 이 교회에 나갈 수 있도록 곧 장로 장립을 기다리시는 집사님 내외가 직접 우리를 차로 안내해 주었다.
예배 중에 목사님께서 나와 김 박사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를 했더니 예배 후에 영문과 선배 언니가 반가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예배 후에 모든 성도들이 돌아가면서 식사 당번을 해서 함께 식사를 하는데 모처럼 맛있는 김치와 불고기, 밥을 먹으니 얼마나 맛이 있던지! 오후 여전도회 모임과 저녁 청소년 예배 시에는 각각 나와 김 박사에게 말씀을 증거하는 시간을 주셨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절제함으로 승리하는 생활을 하자고 말씀하고 몇 가지 간증을 했더니 모인 모든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서로 자기 집에 와서 식사도 하고 말씀도 더 가르쳐 달라고 했다.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 와서 첫 주일 설교 후 온 교인들이 가족이 되니 성도의 교제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깨달았다.

◈ 7월 16일, 주일

영락교회에서 부 목사님으로 시무하시던 한학수 목사님께서 내가 이곳을 방문한 것을 아시고 지난 금요일 호텔로 찾아오시어, 스탠리 고원도 보여 주시고 오늘은 교회의 야외 예배에 초대하셨다. 약간 비는 뿌렸으나 교인들이 함께 모인 자리인지라 훈훈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특송을 부탁하여 캐나다의 대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주 하나님 크시도다”를 마음껏 불렀다.
찬송을 부르고 나니 온 교인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또 얼마나 손을 잡고 기뻐하시는지, 이민 생활의 외로움 가운데서 성도들이 모임으로 크게 위로받으시는 것을 실감했다.

◈ 7월 17일, 월요일

순복음교회에 출석하는 김 박사의 이대 영문과 선배 언니 한성혜 씨의 초대로 이대 동창회에 참석했다. 리듬체조를 하는 재학생들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김 박사에게 기도를 부탁하기에 동창생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려면 설교를 부탁할 터인데 기도를 부탁하는 것을 보니 동창회장이 믿지 않는 사람인 것을 짐작하고 기도는 김 박사가 하면 되니 나는 설교를 해 주겠다고 자청했다.
예배를 보기 위하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찬송을 부르는데, 리듬체조 단원 10여 명 가운데 찬송가를 따라 하는 학생은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렇게 유명한 찬송가를 모른다는 것은 저들 중에 믿는 학생이 별로 없는 것임을 깨닫고 나는 1시간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요성과 함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의 삶의 체험을 간증해 가면서 간절히 전도했다. 설교를 마치고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자고 하니까 모인 여학생들 전부가 머리를 숙이고 영접 기도를 따라 했다. 저들이 버스를 기다릴 동안 나는 “Walking with Jesus"를 가르쳐 주었더니, 저들은 모두 그 노래를 합창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갔다.

이 광경을 보고 감명을 받은 이 지역 이대 동창회 전 회장을 지낸 박승태 씨의 이야기를 듣고 그 남편 되시는 밴쿠버 지역 YMCA 총무 유재정 씨는 모처럼 김 박사가 벤쿠버에 왔으니 밴쿠버 지역 한인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교회 연합으로 학위 논문인 성령론을 이틀에 걸쳐서 1시간씩 강연을 해 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집회를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김 박사가 오는 수요일 저녁 예배 시 한인 침례교회에서 한 시간만 설교를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 부탁과 함께 한상휘 목사님과 함께 내일 낮에 만나러 온다는 것이다.
나와 김 박사는 원래 쉬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게 밴쿠버에 왔는데 이러한 집회를 하는 것이 무리가 될 것 같아서 처음에 좀 망설였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은혜를 끼치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로 보내신 것이라는 깨달음이 있어, 왔을 때 은혜를 끼치고 가자고 김 박사를 설득하여 집회를 하기로 했다.

◈ 7월 19일, 수요일

수요일 침례교회에서 김 박사는 “주님 가르치신 기도” 라는 제목으로 1시간에 걸쳐서 설교를 하였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는 첫 구절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은 구약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누구든지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 하신다고 강조했다.
이와 같이 해석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됨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은 참으로 값진 은혜인 것을 생생하게 설명했다.
설교를 마치고 나니, 유재정 선생님은 오늘 아침 김 박사를 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오늘까지 살게 하셨다고 감격하시고 모든 교인들도 말씀을 사모하여 떠나갈 줄을 몰랐다.

◈ 7월 23일, 주일

밴쿠버의 교외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마치 Sound of Music에 나오는 한 정면과 같았다. 화가의 정서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세계절제대회에 맞추어 캐나다에 올 예정이었던 큰딸 김영주 화가에게 “일주일 먼저 오라.”고 전화했더니 순종하여 어제 밴쿠버에 도착하였다.
김 화백은 기적적으로 서울에서 밴쿠버로 오는 비행기 좌석을 얻었는데, 옆에 앉은 앰베서더 호텔 중역되시는 분에게 전도를 했더니 옛날에 믿다가 사업이 바빠 안 믿고 갈등을 겪던 중, 김 화백의 전도를 받고 새롭게 결단하게 되었다면서 말할 수 없이 기뻐하더란다.

어제 도착한 김 화백은 오늘 교회에서 청소년들에게 절제 특강을, 김 박사는 전체 교인들에게 간증 설교를, 나는 여전도회에서 절제 설교를 하게 되어 한학수 목사님 교회에서 하루 부흥회를 하게 되었다.
김 화백은 캐나다 이민 2세들에게 학교생활에서 이민으로써 위축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긍지를 가지고 담대하게 생활하라고 격려하고 저들에게 술, 담배, 마약의 해독을 일깨우면서, 친구들이 아무리 유혹하더라도 넉넉히 물리칠 수 있는 굳건히 절제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믿음의 경주에서 승리하는 길임을 자신의 유학 생활 경험에 비추어 실감나게 설명하여 학생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김 박사는 하버드에서 박사 학위를 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힘든 영적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길 수 있도록 도와주셨는지 간증하여서 많은 은혜를 끼쳤다.
나는 여전도회에서 40년간 절제운동을 하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몇 가지 말하고 기독 여성들이 가정에서 절제하는 삶의 모범을 보이고 온 가족들이 믿음 안에서 절제하여 성결함에 이르도록 도와야 할 사명이 있음을 강조했다.
여전도 회장님은 마지막에 울면서 회개기도를 하시고 온 회원들도 함께 은혜를 뜨겁게 받았다고 기뻐했다.

◈ 7월 24일, 월요일

한학수 목사님 내외분께서 직접 차로 우리 일행을 빅토리아에 있는 부차트 가든을 보여주시겠다고 오셨다.
밴쿠버에 도착한 후 2주일 동안 쉬는 것과 말씀을 증거하는데 주력하여 관광을 전혀 안 했는데, 마지막 주일에 목사님께서 이렇게 친절히 우리를 안내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빅토리아로 가는 배는 300대의 차를 실을 수 있는 대형 유람선이었다. 차를 타고 배에 들어가 내려서 갑판으로 올라가니 잔잔한 바다 물결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바다 광경을 한 시간쯤 감상하면서 배를 타고 갔더니 빅토리아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여서 곧장 피크닉을 할 수 있는 공원으로 안내하시더니, 한학수 목사님 내외분께서 친히 준비해 오신 갈비 바베큐로 푸짐한 점심을 대접해 주셨다.

점심 식사 후에 함께 뷰차트 가든을 방문했다.
백 년을 가꾼 정원에는 아름다운 기화요초가 만발해 있고 분수는 노래를 따라 신기하게 춤추고 있어서 실로 오랜 기독교 전통에서 나온 국가의 아름다운 면모를 볼 수가 있었다.
이곳에서 페츄니아 씨를 한 통 사 온 것이 김 박사의 집 플라워 박스에서 아름답게 피어나 이제는 집집마다 정원을 장식할 정도로 번식하고 있다.

◈ 7월 26일, 수요일

오늘은 임윤빈 집사 내외가 우리 일행을 위해서 스탠리 공원과 퀸 엘리자베스 공원, 그리고 밴쿠버 교외 수원지를 안내하여 함께 비디오를 찍게 되었다.
임 집사님 내외는 순복음 교회 성가대에서 활약하면서 손 대접하는 은사를 받아 밴쿠버를 방문하는 교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우리에게 공원에서 바베큐를 어찌나 정성껏 대접하는지 주 안에서 받은 은혜에 감격했다. 나는 남을 주고 대접하는 데 항상 익숙해 온 터이지만 이렇게 여행길에 많은 사랑과 은혜를 입게 되니, 어찌 다 감사를 드리랴.
김 화백과 김 박사, 나의 두 딸들은 어머니께서 일생 숨어서 주님을 섬기시더니, 여행을 할 때 보니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통하여 너무나도 아름답게 갚아 주신다고 기뻐했다.
임 집사님 내외가 찍은 비디오는 처음 찍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아름답게 나왔는지, 아름다운 밴쿠버 공원들과 경치를 배경을 하여 두고두고 선교용으로 보이고 있다.

◈ 7월 29일∼7월 31일, 토요일∼월요일

우리는 8월 14일에서 16일까지의 집회를 위해서 다시 밴쿠버로 올 약속을 하고 캘거리로 떠났다.
캘거리에는 6년 전, 100주년 세계절제대회 후에 만난 믿음의 아들, 함상웅 집사가 새집을 사 놓고 권사님 오시기까지 소파의 비닐도 풀지 않고 기다린다고 꼭 다녀가시라는 간절한 초대가 있어서, 세계대회가 시작되기 전 3박 4일간 방문하게 되었다.
캘거리에 도착하니, 함 집사가 공항에 큰 차를 가지고 나왔다. 6년 전에 볼 때와 다름없이 건강한 모습을 대하니 얼마나 기뻤던지. 집에 도착하여 보니 그 전에 우리가 처음 방문하였던 집보다 훨씬 크고 아름다운 집을 새로 지어 가구를 들여놓고 아직 그 비닐도 뜯지 않고 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객실에도 새 침대가 우리를 위해 포장도 뜯지 않은 채로 있었다.
함 집사는 과거 깡패와 다름없는 그가 그리스도를 믿어서 중생한 것을 6년 전 간증했었다. 우리는 많은 심령들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전도했는데, 이번에 와 보니 기도와 말씀 생활에 놀랍게 성숙하여 열심히 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캐나다 북부 지역 인디안 선교, 캘거리 지역 병원 선교 활동으로 평신도 선교사로서 전심을 다하여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김 박사가 한국말과 영어로 이중 통역하며 설교하니 딸 제니퍼와 아들 사무엘이 그렇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주일에는 섬기던 교회와의 갈등으로 가정 예배를 드리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민 교회에 흔한 시기와 질투로 인해 희생된 것을 보고 마음이 측은하여 믿음이 식지 않도록 위로하고 기도했다.

오후에는 가까운 공원에 나가서 산책을 하면서 캘거리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월요일에는 함 집사가 손수 운전하여, 다시 레이크 루이스와 벤프로 안내하였다. 우리는 다 가본 곳이어서 괜찮다고 하니 모처럼 오셨는데 꼭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목사님들이 방문하시면 비디오를 많이 찍어 드려서 좋은 비디오 촬영을 해 드리겠다고 제안했다. 한 시간가량 운전해 가니 캐나다 록키의 아름다운 경관이 드러났고 정오에 못 미쳐 레이크 루이스에 도착하였다. 6년 전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와 달리 호숫물 빛깔이 파란 선명도가 덜하고 조금 뿌연 느낌이 들게 되어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다.
함 집사 대답이, “자꾸 지표의 온도가 올라가니 만년설이던 캐나다 록키의 빙하가 흘러내려서 그렇다.”고 설명한다.
마침 날씨가 맑아서 우리는 함께 “주 하나님 크시도다”, “Blessing and Glory", "I will Sing of the Mercies of the Lord", "Walking with Jesus" 등의 찬송을 부르면서 그곳 경치를 배경으로 비디오 촬영을 했더니, 관광객들이 함께 둘러서서 손뼉을 치고 찍기도 하면서 기뻐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고 벤프로 향했다. 우리가 묶었던 벤프 스프링 호텔을 배경으로 흐르는 폭포 앞에서 비디오 촬영을 하고 캘거리로 돌아왔다.
오고 가는 길에 함 집사는 회심 이후 신앙생활의 성장과 그 가운데 있었던 많은 전도의 역사를 이야기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더욱 반가워서 밤늦도록 이야기하다 보니, 세계 대회를 향하여 우리가 떠날 날이 내일로 다가왔다.

◈ 8월 1일∼8월 10일, 화요일∼다음 주 목요일

세계 대회는 8월 2일부터 시작하나, 김 화백이 세계 부회장으로 하루 일찍 회장단 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우리는 8월 1일 에드몬톤에 도착했다. 호텔에 도착하니 벌써 캐나다 임원단과 세계 회장단들이 도착하여서 우리를 반겨 주었다. 대회 등록을 하고 일정을 받아 보니, 우리 한국 대표가 매일 중요한 프로그램을 인도하도록 짜여 있었다.

8월 2일 정오의 기도회 인도, 8월 3일 낮에는 김 화백의 절제운동과 교회 라는 워크샵, 8월 4일에는 아침 기도회 인도, 8월 5일 한국 절제 활동 발표, 8월 6일 주일에는 오전의 예배에 이어 저녁에는 각 나라 대표 장기 자랑, 8월 7일 민속의 밤, 8월 8일 세계 대회 만찬 연회, 8월 9일 김영주 세계 부회장의 6년 임기 마감 고별사가 있게 되었다.

대회 시종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심령으로 참석하였는데 중요한 예배와 순서 때마다 내게 특송을 부탁하여서, 나는 온 세계 대표들 앞에서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각 나라에 서 모여든 믿음의 용사들과 함께 하나님의 선하신 은혜를 찬양하니 왜 그렇게 힘이 나는지. 절제운동을 하다가 보면 안팎으로 핍박을 많이 받게 되어 참으로 힘든 때가 많은데 이렇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열심으로 일하다가 모인 주의 종들을 대하니 참으로 은혜가 크다.
나는 40여 년 전 전도가 하고 싶고 이웃에게 봉사하고 싶어 절제회에 가입했는데, 이 운동을 하면서 술과 담배, 마약의 해독에 대하여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그 해독을 이웃에게 열심히 깨우치는 자리에 서서 교회의 성결을 위하여 일하게 되었다.
이번 세계 대회에서도 이전과 같이 우리 한국 대표들은 아침과 정오 기도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와 절제운동 워크샵에서도 절제운동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한 것임을 상기시키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절제운동의 부흥의 열쇠임을 강조했다. 이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절제의 열매를 맺어, 술, 담배, 마약, 기타 모든 사회악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고 죄와 싸울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세계기독교여자절제회가 100여 년이 넘도록 금주 · 금연 · 마약 퇴치가 가정과 국가, 인류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크게 이바지한 이유도 바로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한 결과임을 지적하여, 100주년을 뒤로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의 나아가야 할 방향이 오직 한 길,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를 의롭다 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새롭게 강조했다.

한국 대표들은 1980년 쉐필드에서 열린 세계절제대회에 7명이 참석한 후로 대회 때마다 활약이 컸다.
198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절제회 100주년 대회에서 김영주 한국 절제회 부회장이 세계 대회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86년 필리핀에서 열린 대회에서 재선이 되었다.
1989년에는 김정주 박사가 세계 절제회 사회 봉사 부장으로 임명되었다.
절제회 각 나라 대표들은 한국 대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크게 기대를 가지고 있다. 이같이 한국 대표가 세계 절제대회에서 활약하며, 세계 기독 여성들이 “한국 대표들을 통하여 은혜를 받는다.:고 말할 때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는다.

◈ 8월 10일∼8월 14일, 목요일∼월요일

에드몬톤에서 세계절제대회를 마치고 김 박사의 집회를 위해서 오늘 밴쿠버로 가려고 했으나 밴쿠버의 모든 호텔이 만원이어서 8월 14일∼16일에 예약이 되어, 우리는 3박 4일을 세계 절제대회가 열린 에드몬톤의 테라스 인에 머물게 되었다. 우리는 모처럼 조용한 시간이 생겨서 곧 있을 밴쿠버 집회 준비도 할 겸 쉬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이곳에 도착한 것을 연락받은 에드몬톤 한인회장, 김중현 집사님은 섬기시는 침례교회에서 11일 저녁부터 3일간 설교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오기 드문 길이라, 허락하고 11일 저녁 설교를 하려고 호텔 밖을 나서는데 10일간 실내에서 회의만 했던 다음이라 하늘에 해가 떠 있는데, 그것이 해인지 달인지 몰라 볼 지경이었다.
첫날 저녁 설교에 내가 절제회에 가입하게 된 동기와 절제운동의 중요성을 가르쳤는데, 성령께서 함께해 주시어 은혜가 컸다. 참석한 모든 교인들이 더 듣고 싶어 예배 후 교회를 떠날 줄 몰랐다.

11일에는 김중현 집사님이 우리에게 에드몬톤 관광을 시켜 주었다. 처음 시내 구경을 하는데, 세계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 있어 가보니 디즈니랜드 축소판과 같은 놀이터, 인공 바다와 인공 해수욕장, 인공 아이스링크 등이 있었다.

저녁에는 하버드의 김 박사 동창인 게리와 바바라 유워트 내외의 초청으로 그 댁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들은 하버드 교육학 박사, 석사 부부로 김 박사와 동생 김영훈 사장과 교회 친구인데, 절제회 소식을 듣고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함께 즐거운 식사도 나누었다.
저녁에는 김영주 세계 절제회 부회장이 설교를 했는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화가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 위하여 절제운동에 가담하여 어머님을 도와서 많은 가정을 전도하면서, 전도 전시회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교회 교육부장인 김상윤 집사님은 어머님을 도와 순종하면서 주의 일에 동참하는 모습 자체가 이민 2세들에게 큰 간증이 되었다고 온 교인들과 함께 기뻐하였다.

12일에는 김중현 집사님 댁에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천 명분의 갈비를 저장해 놓고 그 어머님과 부인 하명자 집사님은 손님 접대하는 은사를 마음껏 발휘하셨다. 3,000평 대지 위에 새로 지은 집에서, 교인들과 맛있는 점심을 나누었는데 정재기 집사(별명 양재기) 내외의 유머러스한 대담과 함께 성도의 교제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이 자리에서 국회의원의 동생 되시는 아이스하키 코치 되시는 분 내외를 만나서 전도하게 되어 감사했다. 저녁때는 마침 에드몬톤에 있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막내딸의 초등학교 동창생이자, 김학렬 전 국무총리의 아들 김영수 박사의 초대가 있어서 그 댁에 가서 부인이 요리한 맛있는 저녁을 먹고 어린 두 딸의 재롱을 보면서, 반가운 시간을 가졌다.
저녁의 김 박사의 설교는 로마서 8장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이해를 요약한 것이었는데, 거듭거듭,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는 길도, 계속 성령 충만함 가운데 머무는 길도,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임을 강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온 교인들이 모여서 은혜를 받고, 새롭게 믿음을 얻은 자매도 있어서 기뻤고, 에드몬톤 교인들은 절제회를 조직하고자 하여 더욱 감사했다.

13일 주일에는 내게 세 번의 설교 부탁이 왔다. 3일간 설교를 맡았던 침례교회의 주일 낮과 밤 설교를 부탁했다. 또 다른 침례교회에서 주일 낮 설교를 부탁했다. 힘들지만 모두 기쁘게 수락하고 저녁까지 힘있게 설교를 했다. 모든 설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나의 연령도 있는 터라 조금 피곤했지만 이렇게 항상 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잠들었다.

14일 아침에는 김중현 집사님 내외와 함께 식사를 하고 공항으로 나갔다. 걷는 걸음마다 예수님께서 동행해 주심이 너무나 확연해 우리는 “Walking with Jesus”(예수님과 걸으면서)를 부르면서 다시 밴쿠버로 향했다.

◈ 8월 14일∼8월 17일, 월요일~수요일

밴쿠버에 도착하니, 유재정 선생님이 비디오를 찍으시는 Mrs. 권과 한상휘 목사님과 함께 공항에 마중을 나와서 반가이 맞아 주었다. 이번 집회를 위한 광고 신문기사도 보여주시고, 간단히 준비과정을 말씀하시는데, 모든 준비에 만전을 기하시고 있음을 보았다. 호텔은 집회 장소인 영광교회 부근에 있는 홀리데이 인이었다. 저녁 식사 시에 김철수 목사님, 이유선 장로님, 정대성 장로님께서 호텔에 오셔서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모두 연로하신 분들인데도 어찌나 정정하시고 열심히 일하시던지 놀라웠다.

14일 저녁 집회에는 300명이 들어가는 교회에 좌석이 꽉 차서 계속 의자들을 가져다 놓으면서 집회를 계속했다.
첫날 저녁에 김 박사는, 로마서 8:1~4, 5~8, 12~13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이해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육과 영의 대조에 대하여 말씀했는데, 첫째, 성령의 사역의 영역은 그리스도 예수 안임을 지적하고, 성령의 사역의 특징은 죄와 사망의 권세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것임을 명백히 한 후에, 성령의 사역의 근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임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모든 방종주의와 갈라디아교회에 나타난 율법주의의 오류를 지적하며, 현대교회에서 성령 이해의 바른 방향을 바울에게서 되찾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첫 저녁 집회를 마치고 나니, 그 교회에 다니는, 한경직 목사님의 외손녀가 반가이 인사를 했다. 그리고 집회의 피아노 반주는 현재 영락교회 당회장으로 계시는 임영수 목사님의 어머니께서 수고해주셨다. 예배시간에 나와 김영주 화가는 특송을 했다. 절제세계대회를 위해서 준비해간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했다. 집회에는 밴쿠버 방문 중에 전도한 김난이도 나와서 기뻤다. 많은 분들은 첫날 김 박사의 성령론을 듣고 내일 집회에 더 많은 사람들과 오겠다고 말하면서 헤어졌다.

15일 저녁 집회는 광복절 날답게 우리 모두 한복을 입고 갔다. 우리는 가지고 간 태극기를 밴쿠버 지역에 선물했는데, 이국에서 광복절을 맞으니 눈물겨웠다. 나와 김 화백의 특송에 이어서 밴쿠버 지역 청소년성가대의 합창도 은혜로웠다.
둘째 날에는 로마서 8:9~11; 고전15; 로마서 8:14~17, 26~27 말씀을 토대로 하여, 성령의 임재가 그리스도인의 표시가 됨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임재와 일치하는 성령의 임재는 몸의 부활을 보증함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고린도교회에 있었던 부활을 부인하는 문제점을 언급하여, 현대 일부 신학자들도 이 같은 오류에 빠지고 있음을 주목했다. 또한, 성령께서 오시면,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하여, 하나님을 “아ᄈᆞ!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을 보이고, 하나님 자녀 됨은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 됨을 말하는 신령한 은혜를 가리키는 것임을 밝히 설명하여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에게 지고한 영광이 마련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끝으로 중보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피조물들과 믿는 자들이 함께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통된 자세 중의 하나가 탄식임을 보이고, 성도들의 약함 가운데 도우시는 성령의 사역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타남을 주목했다. 요한복음에도 언급된 보혜사 성령의 사역을 지적하고, 이와 같이 중보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있으므로, 성도들은 모든 핍박과 환난을 넉넉히 이김을 강조하여 이민 생활의 고달픔 속에 지친 성도들을 크게 격려하고 위로했다.
김 박사의 설교는 7시 30분경에 시작되었는데, 밤 12시가 되어도 끝날 줄을 몰랐다. 교인이 너무 많이 와서 앞에 앉은 교인들은 설교단 위에 올라가 있었는데, 나는 김 박사 뒤에 앉았던 터라, 살그머니 치맛자락을 잡으면서, 그만하라고 했더니, 옆에 앉았던 한상휘 목사님은 “조금만 더 듣게 해주세요.” 라고 간청을 했다. 12시 30분에야 설교가 끝나 모든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는데 “너무 늦어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8년 동안 공부하신 것을 이틀 만에 들으니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지요. 밤샘하면 어떻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은혜받은 기쁨에 새벽이 되어가는 것을 모르고 감격하고 있었다.

16일 정오에 아리랑식당에서 점심을 베풀면서, 영광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김 목사님은 “김정주 박사의 이름을 바꾸어 김철주라고 하시지요. 설교를 하는데 마치 철과 같이 강인하게 했어요.”라고 말씀하시고는, “귀한 따님을 낳으셨으니 100수를 하십시오.”하고 축복하셨다. 나는 목사님의 축복이 감사하여 아멘 하고 화답했다. 저녁에는 밴쿠버 지역 장로교회에서 김영주 세계절제회부 회장과 김정주 박사가 이민 2세 청소년들에게 설교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를 가득 메운 청소년들은, 김영주 부회장이 증거하는 믿음과 절제생활의 중요성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고 나니, 모든 교우들과 청소년들이 감사와 감격의 인사를 나누어 이국땅에서 애쓰는 동포들이 신앙 안에서 건강하게 자라나는 데 도움이 되는 집회를 가지게 된 것이 마음 뿌듯하였다.

우리 일행은 8월 17일 아침, 벤쿠버를 떠나게 되었다. 공항에는 정대성 장로님, 이유선 장로님, 한상휘 목사님, 유재정 선생님, 시종 비디오를 찍어주신 Mrs. 권, 그리고 김 박사의 동창 김영미 씨 등, 많은 환송객이 나와 주셨다. 아무도 모르고, 벤쿠버에서 조용히 쉬다가 가려던 우리 계획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쓰셔서, 갈급한 교포사회에 성령의 불을 붙이시고, 메말랐던 심령들로 은혜 충만케 하시는 집회를 허락하셨으니 이 모든 축복을 어찌 다 말로 감사할 수 있을까! 절제운동을 위해서 남모르게 힘쓴 지난 40년간 이렇게 풍성한 의의 열매를 걸음 걸음 맺게 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면서, 나는 두 딸과 함께 기쁘게 한국을 향하였다.

필자 후기

1991년 7월 19일, 나는 오랜만에 10여 년 전에 말씀과 기도 생활을 가르치며, 신앙지도를 하던 김 박사의 집에 수년 동안 모이던 목요기도회의 자매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 그 기도 모임을 인도하시고자 잠시 오셨던 오대원 목사님(Rev. Ross)은 “이곳에 모인 자매들은 다 지도자가 되실 분이군요.”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나는 거의 다 이제 막 절제회에서 주최한 패션쇼를 통한 전도사역의 열매로, 믿음의 초보에 있는 자매들이라서 그 말씀을 감사히 받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나고 보니 그때 매주 목요일 모아서 기도와 말씀으로 사랑하고 양육한 어린 생명들이 지금은 온 세계에 흩어져 선교사역을 하여, 전도하면서 말씀을 가르치는 귀한 사역에 일익을 담당하고들 있다.

첫 절제회 패션쇼의 열매였던 이영주 자매는 남편 도상오 형제와 함께 영락교회 부부 집사로서 전도와 교회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다하고, 또 성가 지휘자로 미주순회를 하고, 국내에서도 귀하게 음악 선교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목요기도회에 항상 간식을 공급하던 양순영 자매는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한인교회에 충성하여, 모든 자녀들이 청년회 회장, 성가대에 봉사하며, 한국 유학생들을 집에 늘 초대하여, 모두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특수선교를 하고 있다.
유돈우 국회의원 내외는 절제회 두 번째 패션쇼의 열매인데, 그들은 지금 순복음교회 장로, 권사가 되어 국회선거구인 안동의 지역사회전도와 교회발전에 귀한 사역을 담당하여, 종각을 세워주고, 교회 신축을 도우며, 지금도 절제회와 합하여 안동소망교회 신축을 하고 있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의 부인된 윤순희 자매는 현재 횃불회 회장으로 전 이대 동창생을 중심으로 한 선교회에서 미자립 교회 목회자들을 돕고, 해외 선교지원을 하면서 선교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불도회장의 딸로서 김 박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게 된 남덕자 자매는 절제회 이사로서 절제운동을 지원하며, 신림동에 “열린 이웃”이라는 봉사단체를 개설하고 저들에게 찬양과 예배의 순서를 마련하여 이웃 전도에 힘쓰면서, 이대 영문과, 경기여고 동창 성경공부를 지도하여 많은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고 있다. 올해 6월에는 스위스와 프랑스에 선교여행을 다녀와 그 성과가 컸음을 우리에게 전하여 큰 은혜를 나누었다.
같은 목요기도회 멤버였고, 또 성경공부에 전념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은사를 받아 열심히 봉사하는 성난숙 자매는 이 유럽선교여행 중에 스위스에서 엄낙용 형제와 김영신 자매 부부가 인도하는 기도 모임에서 말씀을 가르치며, 프랑스 파리에서 교회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렸다고 전한다.
목요기도회에 참석하고, 절제회 패션쇼에서 피아노 반주로 수고하던 김양재 자매는 지금 미국 일대, 그리고 하와이, 이번 여름에는 중공의 대학생들을 지도하는 말씀의 사역에 아름답게 봉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언니 김민자 자매는 목요기도회에서 항상 찬양으로 아름답게 특송을 불러주었는데, 지금은 감리교 목사인수를 받아, 필리핀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지난 1년 동안에 600명의 필리핀 사람들을 전도하여 바기오 옆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짓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이 밖에도 그때 함께 기도하고 참석했던 자매들이 각 처소에서 교회를 충성되이 섬기며, 목회자의 아내가 되고, 신학을 하여 전도사가 되며, 풍성한 전도의 열매를 맺고 있는 소식을 들으면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주시는 아름다운 부르심을 감사히 보고, 절제회의 모든 사역의 열매가 조용한 가운데, 크고 아름다워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
  제31장 가야산 단풍구경
  제32장 설악산 피서
  제33장 미국 여행기
  제34장 영락교회 헌당식
  제35장 절제회 장학기금을 위한 패션쇼
  제36장 첫 세계절제대회 참석 및 성지순례
  제37장 100주년 세계대회를 다녀와서
  제38장 미국·캐나다 방문 및 세계 대회 참석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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