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제7부 하나님을 찬양하라 | ||
제63장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추모하며 | ||
1991년 11월 25일은 내게 너무도 뜻깊은 날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10년 동안 꼭 한 번 만나서 전도하고 싶어 하던 이북 여성계 지도자 여운형 선생님의 딸 여연구가 해방 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의 공식 초청을 받아서 서울을 방문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여운형 선생님은 일제 당시 독립투사로 가장 존경받던 어른으로 우리 여 씨 가문의 자랑이었다. 여운형 선생님의 동생 여운용 씨는 같은 집안이라고 우리 친정에 오빠들을 보러 자주 오셨는데, 우리 항렬이 높아서 내가 여운형 선생님께 할머니가 되니 여연구는 내 증손녀가 되었다. 고 윤보선 대통령께서 19세 때,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에 계시던 여운형 선생님을 방문했다. 여운형 선생님은 나이가 어리니 오히려 한국 장래를 위해서 유학을 가라고 지도해 주셨다. 그 후 영국에서 유학하시어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신 고 윤보선 대통령께서 생전에 가장 존경하시던 분이 바로 여운형 선생님이셨다고 한다. 1980년 대한기독교여자절제회 연합회 회장으로 영국 쉐필드에서 열렸던 절제 세계대회에 내가 참석하게 되었을 때, 덴마크에서 그 대회 직후에 열릴 예정이던 세계 여성대회에 여연구가 이북 대표로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덴마크에 가서 이 딸을 꼭 만나서 예수님을 믿고 우리 민족이 전쟁 없이 평화 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하라고 간곡히 권하고자 했으나, 당시 한국 정부가 세계여성대회 100주년에 내가 굳이 참석하였던 이유도 바로 여연구를 만나서 전도하고자 함이었는데, 그때 여연구가 오지 않아서 중국 대표와 소련 대표만 전도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쉬지 않고 지난 10여 년간, 이북 여성 대표 여연구를 만나서 전도하여 한국에 평화통일을 가져오는데 협조하게 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1991년 봄 여(呂) 씨 종친회 회장으로 있던 조카 여세현 사장을 통해서 여연구의 서울 방문 소식을 미리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실감했다. 여연구는 서울을 방문한 첫날 바로 아버지 여운형 선생님의 묘소를 참배했다. 이 묘소 참배는 여 씨 종친회가 추모회를 마련하게 되어있었다. 나는 조카 여세현에게 몽양 선생님을 기리는 추모 예배를 보자고 제의했으나, 안기부에서 몇 가지 이유를 들어서 허락하지 않았다. 추모회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귀한 자리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던 중, 바로 추모식 새벽에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추모하는 아름다운 기도시가 성령의 감동 하심으로 내게 떠올라, 나는 이 시를 추모회 때 읽을 것을 결심하고 둘째 딸 김정주 박사에게 추모시 낭독을, 큰딸 영주에게는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추모 특송으로 부르라고 부탁했다. 아버지의 묘소 앞에 선 여연구의 눈에는 눈물이 비 오듯 쏟아졌다. 괴한의 총탄에 쓰러지신 존경하던 아버지의 묘소를 처음으로 찾은 그 심정이 오죽 슬펐겠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더니 우는 여연구를 보니 혈육인지라 나도 눈물이 글썽해졌다. 얼마 후 여연구가 진정하자 김정주 박사가 추모사를 우렁차게 읽었다. 그 후 큰딸 김영주 화가가 “주 하나님 크시도다”를 은혜롭게 부르니 여운구와 이북 여성 대표들은 깊은 감명을 받고 어떤 이는 영주에게 와서 사인 해 달라는 뜻으로 “수표(手表)해 주세요.” 하고 간청했다. 추모회가 끝나서 내가 추모 기도시를 여연구의 손에 꼭 쥐어 주니 눈물로 감사해 했다. 여연구와 함께 아시아 여성 대회에 참석하면서, 나는 여연구에게 분홍 실크 옷 한 벌과 과일을 선물로 주었다. 둘째 날 여 씨 종친들이 함께 둘러앉아 대회 중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큰딸 김영주 화가와 여연구에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전했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께 서 예수님을 믿으시고 신학까지 하신 분이니 여연구도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도했다. 그리고 지금 연료 사업을 하는 할아버지는 석탄이 없어서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가서 파오는데, 북한은 석탄이 풍족하고 남한에는 쌀이 많이 남아서 처치 곤란한데, 우리가 서로 직교역을 하면 얼마나 좋겠냐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제 한국은 한 형제, 한 핏줄, 단일 민족이니 남북한이 전쟁 없이 꼭 평화 통일하도록 여연구가 이북에 돌아가면 힘쓰라고 당부했다. 여연구는 이 모든 것을 들으면서, 영어로 “I see. I see.(알았어요. 알았어요)”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우리 이야기를 한 번도 거부하는 일이 없이 기쁘게 경청했다. 여연구는 그날 오후 기념 촬영을 하는데 내가 저 멀리 서 있으니, “나는 할머니하고 한 번도 사진 못 찍었어요.” 하면서 증손 딸답게 다정하게 사진을 찍자고 왔다. 그리고 호텔 앞에서 데모 떼들이 와서 이북 대표들을 향하여 데모를 하고 또 당시 저들의 임수경 양 방문 계획이 뜻대로 관철되지 않게 되자, 여연구와 이북 여성 대표들은 일정을 하루 앞당겨서 이북으로 돌아갔다. 나는 바빠서 판문점에 나가 전송 해주지 못했는데, 여연구는 판문점에 전송 나온 조카 여세현 사장 편으로 ‘할머님께, 김영주 화가께. 여연구 드림.’ 이라고 쓰고 정중하게 포장한 북한에서 생산한 조선 본견 양단 옷감 두 감을 선물했다. 그리고 가면서 이번 방문을 통하여 혈연의 정을 새롭게 느꼈다고 소감을 피력하고 떠났다. 여연구가 평양으로 돌아가고 나서 2주일이 못되어서, 남북한 회담은 기적적인 성과를 거두어 함께 통일을 향하여 구체적으로 협조할 것을 비준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나는 다시 한 번 통일을 위한 우리 민족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신실하신 은혜를 깨달아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돌렸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우리의 주 예수님은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사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키시사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시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날이 심히 가까운 이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남북한을 통일시키사 통일 한국의 성도들이 땅끝까지 나아가서 아직도 십자가의 복음을 알지 못하여 죄 가운데 얽매인 불쌍한 많은 민족들에게 복음을 전도하도록 사명을 맡기신 적을 나는 믿는다. 어서 속히 남북한이 통일되어, 남북한 성도들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전하라는 하나님의 지상 명령을 온전히 감당하게 해 주실 것을 오늘도 주님께 나는 간절히 기도드린다. 1993년 4월 18일 보도에 의하면 김영삼 대통령이 이끄시는 문민정부는 역사적으로 왜곡되어 있던 여운형 선생님에 대한 인식을 재평가하여 그의 독립운동의 지대한 공적을 참작하여 여운형 선생님을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일등 유공자로 추대하려고 한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추모사 민족의 빛이시오 가문의 자랑이시던 사랑하고 존경하는 몽양 선생님!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 민족이 나라를 잃고 성(姓)도 잃고 일제의 악랄한 구둣발에 이 땅이 짓밟힐 때 모두가 제 한 목숨 살리겠다고 친일파로 넘어가던 그 시절에 우리의 자랑이신 몽양 선생님은 허허벌판 중국 상해 땅에서 아무도 반기는 이 없는 그곳에서 민족 독립 의지 하나로 모든 역경과 환난을 이기셨지요! 나라를 찾겠다고 애쓰시고 고생하시며 동지들을 격려하여 미국으로 유럽으로 보내시면서 처절한 한민족 해방운동을 지도하셨지요 이 모든 업적과 사연들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으리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나님은 우리 몽양 선생님의 애타는 그 기도와 애국의 충정을 기쁘게 받으시고 이 민족을 일제의 마수에서 해방시켜 주셨지요! 그러나 몽양 선생님은 민족 대화합의 포부를 이루지도 못하시고 어느 악마의 소행인지 불의의 피격으로 암살당하셨으니 선생님을 아끼고 민족의 장래를 선생님께 맡기고자 한 모든 애국지사들에게는 너무나 큰 통한이요 이 민족에게는 말할 수 없는 큰 손실이었습니다 세월은 유수 같아서 가신 지도 벌써 45여 년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랑하는 몽양 선생님! 지금 선생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던 따님이 민족의 한이 맺힌 휴전선을 넘어 이곳에서 성묘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그 높은 곳에서 하감하시고 이모든 원수들의 죄와 악을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소서! 다시는 이 땅에 동족끼리 총을 쏘는 이 비참한 사연들이 이 땅에 재현되지 못하도록 그 천국에서 하나님께 부탁 드려 주소서 사랑하는 몽양 선생님 한 분의 죽음도 우리 가슴 속에 지난 40여 년 간 피맺힌 한을 품게 하였고 분노케 하였는데 하나님! 이 민족의 모든 죄를 십자가의 보혈로 용서하시고 우리 민족에게 영원한 평안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따님 연구 씨도 이제 아버지의 원수를 용서하시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소서 의인의 자손은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몽양 선생님! 하나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영원한 생명수·강가에서 먼저 가신 믿음의 용사들과 함께 감격의 영원한 찬양을 부르시며 주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1991년 11월 25일 몽양 여운형 선생 추모회, 고문 여귀옥) |
||
제56장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시집(Ⅰ) | ||
제57장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존대하며: 시집(Ⅱ) | ||
제58장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 시집(Ⅲ) | ||
제59장 하나님께 바친 은혼식(1967. 10. 27.) | ||
제60장 모교 70주년 | ||
제61장 아름다운 결혼식 | ||
제62장 금혼식 | ||
제63장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추모하며 | ||
제64장 고희 잔치 | ||
제65장 한평생 주님을 전하며 | ||
제66장 어머님 자서전『아름다운 추억』편집을 마치며 | ||
제67장 나의 어머님 | ||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