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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절제회 | 2018.11.09 14:55 | 조회 17693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교과과정초등학교 > 5학년 > 2학기 > 사회 5-2 > 3. 유교 문화가 발달한 조선 > 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목차


1. 말에서 떨어진 장수

이순신은 인종 1년(1545)에 한양에서 태어났어요. 그의 집은 매우 가난해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어요. 이순신이 여덟 살 되던 해, 그의 가족은 외가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사를 했어요. 아산에 내려간 이순신은 학문과 무예()1)를 닦아 늠름한2) 청년으로 자라났어요.

이순신은 스물여덟 살이 되던 해에 무과 시험을 보았어요. 시험은 활쏘기, 칼쓰기, 창던지기에서 말타기로 이어졌어요.


“자, 연습했던 대로만 하면 돼.”

이순신은 혼잣말로 마음을 다스린 뒤 말을 몰았어요. 이순신은 말과 한몸이 되어 장애물을 뛰어넘는 묘기를 보였어요. 그런데 잘 달리던 말이 갑자기 앞발을 번쩍 드는 것이었어요. 이순신은 순간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어요.

“저런, 장원을 맡아 놓았던 젊은이가 실수를 했군.”

사람들은 빼어난 무술 실력을 보이다가 말에서 떨어진 이순신을 안타까워했어요. 말에서 떨어진 이순신은 재빨리 일어서려 했어요. 그런데 왼쪽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어요. 이순신은 다리가 부러졌다는 것을 알았어요. 하지만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한쪽 발로 펄쩍펄쩍 뛰어가 근처에 있는 버드나무를 꺾었어요. 그런 다음 부러진 다리에 버드나무를 대고 묶었어요.

이순신은 다시 말에 올라 시험을 마쳤어요. 물론 시험에 합격하지는 못했어요. 그러나 포기할 줄 모르는 용기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지요. 이순신은 4년 뒤 다시 시험을 치러 무과에 급제를 했고 벼슬도 하게 되었어요.


2. 거북선을 만들다

이순신은 낮은 벼슬부터 시작해 차츰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어요. 그러는 동안 오랑캐를 무찌르는 공을 세우기도 했고, 모함을 받아 벼슬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했어요.

“마마,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보내 남쪽의 방비를 맡게 하소서.”

우의정 유성룡이 선조 앞에 엎드려 아뢰었어요. 유성룡은 이순신의 인물됨을 일찌감치 알아본 친구였어요.

“겨우 작은 고을의 현감을 하루아침에 좌수사라는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조정의 대신들이 한목소리로 이순신의 승진을 반대했어요. 그러자 선조가 딱 잘라 말했어요.

“이미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로 정하였으니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마시오.”


어렵게 전라 좌수사가 된 이순신 장군은 곧 군사들을 다잡고, 무기와 배를 만들었어요. 1592년 3월, 여수 앞바다에 이상한 배가 떠 있었어요. 그것은 이순신 장군이 발명한 거북선이었어요.

“우아, 저렇게 무시무시한 배가 있었나?”

사람들은 거북선을 보고 탄성을 쏟아 냈어요. 더구나 새로 고친 화포()3)에서 포탄을 쏠 때면 엄청난 힘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어요.



〈거북선은 어떤 배였나?〉
지금까지 발견된 자료를 바탕으로 거북선의 모습을 그려보면 뱃머리에는 용머리 모양을 달았고, 배 위에는 나무 판자를 덮은 다음 뾰족한 송곳을 촘촘히 박았어요. 그리고 그 사이에 십자가 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병사들이 지나다닐 수 있게 했지요. 거북선의 윗부분은 이렇게 판자(철판이라고도 하지만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음)로 덮여 있는데다가 송곳까지 꽂혀 있어서 적이 올라탈 수 없었어요. 안은 2층으로 되어 아래층에서는 노를 젓고 위층에서는 적을 향해 총포를 쏘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왜군들이 조선으로 밀려왔어요.

“장군, 사천에 왜군의 배가 떴다고 하옵니다.”
“북을 울려 출동을 알려라!”

거북선은 이순신 장군의 두 번째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었어요. 이순신 장군은 날렵한 거북선을 앞세워 왜선 13여 척을 순식간에 가라앉혔지요.

임진왜란은 1592 ~ 1598년까지 7년 동안 이어진 왜군의 침략 전쟁이에요. 1597년 제2차 침략 전쟁은 정유재란이라고 부르지요.


3.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장군은 싸움을 하는 대로 모두 승리했어요. 왜선 20여 척을 물리친 당포 해전, 6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한 당항포 해전, 70여 척의 왜선을 물리친 한산도 대첩, 부산에 모여 있던 왜군을 기습하여 470척의 배 중 100여 척의 배를 부순 부산포 해전 등을 겪으면서 왜군들은 이제 이순신의 이름만 들어도 싸울 마음을 잃었어요.

이순신 장군이 바닷길을 끊고, 육지에서는 권율 장군과 김시민 장군에게 패하자 왜군들은 급격하게 힘이 약해졌어요. 여기에 명나라 군대까지 평양성을 공격해 오자 왜군들은 전쟁을 멈추고 휴전을 위한 회담을 벌이자고 했어요.


그런데 이 때 조정에서는 왜군의 계략()4)에 속은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5)했어요. 이순신은 이 모함으로 벼슬을 잃고 백의종군()6)해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의 일개 병사가 되었어요. 왜군은 이순신이 없는 틈을 타 다시 쳐들어오기 시작했어요. 600여 척의 배를 몰고 부산으로 밀고 들어오는 왜군을 원균이 막으려 했어요. 하지만 원균은 200여 척의 배를 모두 잃고 달아났지요.

“이순신을 삼도 수군 통제사7)로 명하노라.”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불렀어요. 이순신은 곧 전라 우수영으로 달려갔어요. 그러나 그 많던 전함 중 남은 것은 겨우 12척뿐이었고, 수백 명 남은 병사들도 그나마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지요.

“죽기로 싸우면 이길 것이고, 살고자 싸우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은 실망하지 않고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워 명량 앞바다에서 큰 승리를 이끌어 냈어요. 그러는 사이 왜군은 우두머리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싸움에서 연거푸 패하자 후퇴를 결심했어요.

“다시는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순신은 왜선 500여 척이 떠 있는 노량 앞바다로 공격해 들어갔어요. 이 싸움에서 왜군은 400여 척의 배를 잃었어요. 하지만 왜군이 쏜 총탄이 이순신의 가슴을 뚫고 말았어요.

“지금은 싸움이 한창이니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은 숨을 거두면서까지도 병사들을 생각했어요. 선조 31년(1598) 이순신은 바다 위에서 죽음을 맞았어요. 왜군들은 노량 해전에서 크게 지고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났어요. 7년 동안의 긴 싸움이 끝난 거예요.


난중일기는 충무공 이순신이 임진왜란 7년 동안 쓴 일기예요. 난중일기에는 당시의 일들이 간결하게 기록되어 있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 (천재학습백과 초등 스토리텔링 한국사, 천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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