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독교여자 절제회 - KWCTU

말씀설교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마태복음 15:21-28,막 7:24-30) 칼빈의 주석

절제회 | 2018.07.23 11:37 | 조회 5869


아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을 칼빈 주석을 번역해서 올립니다.
이름도 없는 이 여인의 믿음을 우리도 함께 소유하게 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https://www.ccel.org/ccel/calvin/comment3/comm_vol32/htm/xlviii.htm


 


칼빈주석으로부터 배우는 마태복음 15:21-28 ( 7:24-30) 이해


 


가나안 여자의 믿음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믿음이 크도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태복음 15:21 가나안 여자 하나가 지경에서 나와서


 


기적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이방인들에게 흘러갔는지 배운다.  아직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밝히 자신을 나타내실 충만한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마침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차별 없이 공통되게 자비를 주실 것을 미리 보여주시기로 여기서 그는 의도하셨다. 놀라운 믿음의 본으로 가나안 여인이 우리에게 제시되는 한편, 유대인들은 그들에게 약속된 구속을 그들의 수치스러운 불경건 때문에 빼앗기게 것을 비교하여, 우리를 가르치신다.


 


마태가 가나안 여인이라고 하는 여인 마가복음에서 희랍사람이고, 수로보니게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그러나 여기 모순은 없다.  이는 우리가 아는 대로, 유대인들은 모든 외국인들을 희랍사람이라고 하는 풍습이 팽배했고, 이것이 바울의 기록에 자주 나오고 있다.  여인이 두로와 시돈 영역에 살았던 사람이어서, 그가 수로보니게 여인이었다고 불리는데 의아해 까닭이 없다.  이는 지방이 시리아라 불렸고, 페니시아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경멸조로 붙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아마도 그들의 본토에서 쫓겨나 가까운 이웃에 피신해 가나안 족속의 후손들이었을 것이다.  여인은 이방 사람이며,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고, 스스로 그리스도께 나와서, 겸손히 그의 도우심을 구한다는 점에서, 마태와 마가는 일치한다.


 


 


 


마가복음 7:24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우리는 마가가 언급한 상황을 주목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장소에 오셨을 , 그는 그의 깃발을 꽂지 않으셨고, 단지, 잠시 숨어 있기를 구하셨다. 숨은 상태에서, 사적으로 머무는 개인처럼 말이다.  마가는 육신의 보통 이해에서 말한다.  이는 비록 그리스도께서 신성한 영으로 무엇이 일어날 미리 아셨지만 그러나 아버지의 사역자와 대사로서 그는 그의 인성이 우리가 기대하도록 이끄는 대로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자신을 지켰다.  그런 점에서 그가 사람으로 원했던 것을 그는 이룰 없었다.  , 그리스도께서 소리로 기적을 보이면서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구속을 제안했지만, 주님의 언약의 상속자요, 특별한 그의 백성이요, 같은 제사장이라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은, 칼빈이 말했던 것처럼, 그에 대하여 눈멀고 귀가 먹어서 깨닫지 못하였다.  그런 점에서, 사건 (수로보니게 여인의 나타남) 강력하게 정죄하고 있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아무 상관이 없었고, 처음 보기에는 언약에 전혀 속하지도 않았던, 여인은 그의 목소리나 그의 기적들을 듣지도 못했으나, 그리스도께 스스로 나왔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5:22.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비록 여인은 외국인이었고, 주의 양떼에 속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경건의 맛을 조금 보았다. 이는 약속들에 대한 어떤 지식이 없이는 그녀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의 순수하고 건강한 가르침으로부터 유대인들은 진실로 전적으로 거의 떠났거나, 적어도 매우 곁길로 갔다.  그러나 약속된 구속의 소문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교회의 회복은 다윗의 통치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메시아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습관적이었다.  참으로 고백은 모든 사람들의 입술로부터 들려왔다.  그러나 진실한 믿음이 그들 가운데 죽었으므로, 약속의 달콤한 향기가 이웃 나라에 미쳤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은혜롭고 놀랍게 나타내었다.  비록 여인이 어떤 선생으로부터도 교육받지 못했으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믿음은 그녀에 의해서 아무 때나 얻게 개념이 아니었고, 율법과 선지자들로부터 형성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여기서, 때때로 내포되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충만하고 명백한 건전한 가르침을 동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는 만약 우리가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과 기원은 진실한 원칙으로부터 나온다는 것과 그러므로 항상 지식의 어떤 빛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또한 붙든다면 그렇다.


 


마태복음 15:23 예수는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여인의 믿음에 대하여 칭찬을 한다. 여기서 그들은 그녀의 흔들리지 않는 한결같음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침묵은 일종의 거절이었으나, 시련에 그녀는 눌리지 않았다는 것이 경이로운데, 더욱 기도를 지속함으로 그녀는 견디어냄을 증거했다. 이것은 믿음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의 성격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기도를 바르게 없다고 우리에게 확신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일을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로마서 10:14)


 


비록 그리스도께서 침묵하실지라도, 그렇다면 누가 그녀 자신의 기분으로부터 용기를 얻는 여인이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가지 방법, 말씀하심과 침묵하심으로 대응하심을 마땅히 살펴 보아야 것은, 비록 그가 입으로 말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는 여인의 마음에 말씀하셨다는 것과 은밀한 영감은 외부적 설교를 대체했다는 것이다.  밖에도, 그녀의 기도는 믿음의 들음에서 일어났다 (로마서10:17). 그러므로 비록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그녀는 이미 배운 , 그리스도께서 구속주가 되신다는 것을 그녀가 이미 배운 건전한 가르침으로 계속 듣고 있었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때때로 그를 믿는 자들에게 행하신다.  그는 그들에게 말씀하시는데, 또한 침묵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의 증거에 의존하여, 거기서 그들은 그가 말씀하고 계심을 듣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을 확실히 믿는다. 그런데, 주께서 그들의 구하는 것이나 기도를 당장 대답하지 않으시므로, 그가 듣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럴 , 우리는 그리스도의 침묵의 의도를 그녀의 믿음을 끄시려는 것이 아니었음을 본다.  오히려 그녀의 열심을 일으키며 그녀의 믿음의 열정에 불을 붙이기 위하심이다.  그러나 만약 가나안 여인의 마음 속에 작은 씨앗의 가르침이 그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면, 어느 때나 그가 당장 기쁜 응답을 주지 않으실 우리가 낙담하는 것은 우리에게 맞지 않는 것이다.


 


그를 보내소서


 


제자들은 그녀에 대해 아무 은총 베풀기를 구하지 않고, 그녀의 끈덕진 요구에 대하여 귀찮아 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라도, 그를 떠나 보내기를 원했다.  교황주의자들이 구절을 가지고, 이미 죽은 성자들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이라는 생각을 지지하며 노력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여인이 제자들에게 어떤 은총이나 도움을 구하려고 간청하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구절로부터 죽은 성자의 중보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구하려는 것은 거리가 멀다.  거기에 죽은 자와 자의 차이가 있지 않은가.  만약 그들이 그녀를 위해서 변호하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아무 것도 얻을 없음을 관찰해야 것이다.


 


마태복음 15:24.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그가 가나안여인을 거부함으로 그는 자신이 혼자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자로 지명 받은 것은 전적으로 유대인들을 위하심인 것을 사도들에게 알리신다. 그는 아버지의 부르심과 명령에 기초하여 낯선 자들에게 어떤 도움도 주어서 된다고 주장하신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이 항상 그렇게 좁은 한계 안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상황들이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시작하여야 했고, 자신을 특별한 방법으로 헌신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10:15 말씀을 해석하면서 칼빈이 말했던 것처럼, 중간에 막힌 (에베소서 2:14) 그리스도의 부활 후까지는 아직 헐려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사도들에게 당시에는 유대 외에는 어느 곳이나 가르침의 씨앗을 뿌리는 것을 금했다.  바로 , 그러므로 그는 경우에, 아직 이방인들에게 순서에 따라서 가기 전까지는 유대인들에게만 보내졌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외에는


 


그는 이스라엘 집의 양이라는 표현으로, 택하심 받은 자들에게만 아니라 거룩한 조상들의 모든 후손들을 가리키신다. 이는 주께서 언약 안에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셨기 때문이요, 그들 모두에게 구속주가 약속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주께서 예외 없이 누구에게든지 나타나셨고 자신을 제공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구절에서 그가 우리에게 그가 오심은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하신 것처럼 (마태복음 18:11), 주께서 자신을 잃어 버린 양에게 보내셨다고 선포하신 것을 관찰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현재 은총을 유대인들과 같이 누리면서, 우리는 우리의 형편이 우리 구주께서 나타나시기까지 어떤 형편인지 배운다.  


마태복음 15: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우리는 여인이 완고하게 다툰다고 생각하기 쉽다. 마치 그녀가 그리스도의 의사에 반하여 그로부터 무엇인가 억지로 얻어 내려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녀가 메시아의 친절하심을 알고 확신함으로 동기부여가 되었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명백하게 자신의 역할에 속하지 않았다고 선포하셨을 , 그녀는 거부에 주눅들지 않고, 그녀의 목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이유는 이미 칼빈이 언급했던 믿음의 정서를 굳건하게 붙들고 있어서, 그의 소망을 반대하는 아무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우리의 구원의 일반적 시작에서 우리가 떨어져 나가도록 허락하지 않는 것이 믿음의 확실한 시험이다. 


 


마태복음 15:26.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그리스도의 대답은 어느 때보다 거칠다.  그리고 그가 모든 소망을 끊어버리려고 의도하셨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는 그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혜는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요, 그들에게만 부어져야 것이라고 선포하면서, 다르게 하면, 그들의 마땅한 권리가 훼손당할 것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녀가 그의 은혜에 동참할 자격이 없음을 암시하면서, 경멸하듯이 여인을 개와 비교한다. 뜻을 쉽게 우리에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자녀들의 이라는 표현이 여기 주어져서, 하나님의 모든 은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독특한 방법으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어지는 것들을 말하고 있다.  이는 태초부터, 하나님의 선하심은 실제로, 하늘과 땅의 모든 것에 녹아 들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심을 느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더욱 높게 그리스도 안에서 기대된 축복이 아브라함의 가족 안에 배타적으로 머물고 있었다. 족속에게 특별한 특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구별 없이 개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옆으로 밀어 놓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렇게 하면 우선 순위를 가진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동일 선상에 놓이기 때문이었다.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던지다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로부터 취한 것을 가지고 이방들에게 주는 것은 나누는 것이 아니라고 시사하신다.  그러나 이것은 유대 사람들만 하나님을 부르던 때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곳에서나 그의 복음의 빛을 나타내셨을 , 그래서 이방인들이 동일한 구원에 그와 함께 참여하도록 허락을 받고 나서, 구별은 제거되었다. 이전에 개와 같던 자들이 이제는 자녀들 중에 속한 자들로 여겨지게 되었다. 우리가 개와 같은 성질을 지닌 자들이라는 것을 배울 , 우리의 육신의 교만은 무너져야 한다.  태초에 의심할 여지 없이,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밝게 빛났다. 그렇게 높은 지위를 소유하여서, 그렇게 야비한 명칭은 모든 족속에게 적용되지 않았고, 왕들에게조차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지닐 있는 영예를 주셨다.  그러나 아담의 배반과 반역은, 부모의 죄로 인하여 사생아들이 자들을 개와 같이 동물 우리에 보내는 것을 합당하게 만들었다.  더욱 특별히 유대인들은 보통 숙명에서 면제되었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쫓겨났는데, 이들 사이에서 비교를 , 더욱 특별히 그러했다.


 


말씀을 주심으로, 그리스도의 뜻은 마가에 의해 더욱 충만하게 계시되었다. 자녀들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해야 할지니.  그는 가나안 여인에게 말했다.  그녀가 행동하는 것이 마치 저녁 식탁 복판에서 식탁에 있는 것을 마구 집는 것과 같이 무례하게 행동한다고 말이다.  그의 주된 계획은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운데서, 그들에게 값없이 주어진 시간으로 환산할 없는 이익을 거부하는 유대인들을, 그것을 따뜻한 마음과 성실함으로 찾는 이방인들과 비교하여 이렇게 극적으로 묘사하며 지적하신 것이다 ( 문장은 의역입니다).


 


마태복음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여자의 대답은 그녀가 장님과 같이 혹은 생각 없는 충동으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대하여 완전히 상치되는 것을 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을 다른 민족들보다 사랑하셨으므로, 그녀는 입양의 영예를 그들과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선포했다.  그녀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미리 규정하신 순서대로 그들을 먼저 만족하게 하셔야만 한다는 것에 대하여 어떠한 반대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남은 부스러기 구했다.  우연히 떨어지는 것들은 개들도 먹게 해야 한다는 것만 요구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게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를 유대인들 사이에서만 제한하시고 이방인들로 조금 맛을 보도록 주시지 않은 때는 없었다. 어떤 말도 합당하게 혹은 공정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집행되는 때를 묘사하도록 사용되기에는 불가능했다.


 


마태복음 15:28. 믿음이 크도다.


 


주께서 여자의 믿음을 먼저 칭찬하시고 나서, 그녀의 믿음 때문에 주께서 그녀의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라는 것을 이어 선포하셨다. 그녀의 믿음의 위대함은 가장 크게 관점에서 나타난다.  , 아무 도움도 의지하지 않고, 희미한 가르침의 빛을 의지하여, 그녀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역할을 인식하였고, 그리스도께 하늘의 능력을 돌렸다.  그리고 거대한 반대를 통해서도 침착하게 그녀의 길을 추구했다. 만약 그녀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얻을 것에 실패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확신에 의해 붙들리고 있지 않았다면 없었던 그것을 그녀는 자기가 없어지기까지 견뎌냈다.  마디로 그녀의 신념을 겸손으로 지켜서, 그녀가 근거 없는 주장을 세우면서도, 자신의 자격없음에 대한 인식으로, 그리스도의 은혜의 샘이 그녀에 대하여 닫히지 않도록 했다. 칭찬이 이방여인이었던 여자에게 주어지면서, 하나님께 구별된 것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의 감사하지 못하는 죄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여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약속도 없었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는 정반대로 여자를 내어 쫓는 말씀만 주셨다. 그런데, 어떻게 여자가 바르게 믿었다고 칭찬을 들을 있는가? 이는 그리스도께서 비록 거칠게 여자의 기도를 거부하시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서 약속하신 구원을 주셨다는 것을 여자가 확신하고, 은혜로운 소망을 붙드는 것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은 여자에게 닫혀 있었으나, 완전히 제외시키려는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끈질긴 믿음으로 노력하여, 여자가 길을 힘차게 밀고 비록 사이로라도 전진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을 여자는 내린 것이었다.


 


소원대로 되리라.


 


마지막 구절은 유용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무엇이든지 얻어낼 있다는 것이다.  믿음을 주께서 그렇게 높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 있으시다.                                                                      


 


우리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 아버지!


저희에게 가나안 여인의 믿음과 같은 끈기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저희가 이웃을 위해 중보 하는 기도를 다 응답해 주셔서


주님 나라가 이 땅에 속히 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을 받들어 간절히 기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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