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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이미 도래하였고,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온전히 누리게 될 그리스도의 왕국의 아름다움(이사야 35장) 칼빈 주석

절제회 | 2018.07.24 17:23 | 조회 3910
이사야 35장 칼빈 주석 번역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워 즐거워하며


 


여기 35장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놀라운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 34장에서 그는 에돔의 파멸에 대하여 묘사했다. 그것이 광야로 변할 것을 말했다.  이제 그는 그와 다르게, 광야가 옥토로 변할 것을 말하며, 버려지고 황량한 땅이 열매를 풍성히 맺을 것을 약속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온 땅을 축복하시며, 어떤 곳에는 조금 물을 주시고 다른 곳에는 더욱 풍성하게 물을 주셔서 축복하시며나 그 후에라도 사람이 감사하지 않으면 그로 인하여 그 축복을 다 거두시고 가져 가신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로 설명된다.  유대인들은 잠시 다스리는 메시아의 통치에 대하여 이런 모든 말씀을 적용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상상으로 꾸며낸 것이니 칼빈은 취급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유대땅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다른 사람들은 이방인들을 말한다고도 한다.  그러나 칼빈은 이것이 유대땅과 온 세계를 포함한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주장한다.  왜냐하면, 주께서 세계의 파멸을 예고하였고, 유대땅도 면치 못할 것을 말씀하셨을 뿐더러,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할 때가 시작되었나니” (베드로전서 4:17)라고 하심으로, 특별하게 거룩한 땅의 슬픈 파멸을 이미 예고한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래서, 유대 땅으로부터 합당하게 공평하게 시작하여, 그는 온 세계를 황무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곳에 가득하여, 칼빈은 이 말씀이 유대땅을 말하며, 그 후에 세계 다른 곳들을 뜻한다고 본다.  이는 마치 그가 말씀하기를, 주께서 사람의 악과 죄를 벌한 후에, 유대와 이방에 원수를 갚은 후에, 황무지를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변화시키며, 온 세계의 지면을 새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제 이러한 회복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놀라운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들의 불순종으로 그의 화를 돋구어서, 그들은 모두 멸망하기에 합당하고, 완전히 파멸되어야 하였고, 그의 백성이라고 특별하게 입양한 무리들이 그러하였다.  이사야는 그 시선이 특별히 유대인들을 주목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고통스러운 상황에 절망하지 않게 하려함이다.


 


이제 이 예언이 언제 이루어졌던지, 혹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지, 살펴보자. 주께서 이러한 회복의 역사를 바벨론에서 그의 백성을 이끌고 나오실 때 이미 시작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첫 맛을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말씀과 이와 같은 맥락의 다른 말씀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말하고 있다고 칼빈은 주저함이 없이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으나, 마지막 때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만물을 회복하실 때 (사도행전 3:21) 라고 부르는데, 이는 믿는 자들이 그 날이 오기까지 완전한 쉼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그렇게 고귀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날에 믿는 자들의 진정한 행복이 가장 충만하게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계에 미칠 무서운 재앙에 대하여 말하고 다가올 한탄스러운 파괴를 예고한 후, 선지자는 믿는 자들을 곧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라는 이 약속으로 위로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소생되고 즐겁게 될 것이다.  그만 홀로 만물을 소생시킨다. 그리고 바른 질서로 회복시킨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고, 오직 더러운 것과 파멸과, 하늘과 땅의 가장 비참한 파괴 외에는 없다. 그러나 주의 깊게 바라 보아야 할 것은 온 세상이 이러한 성격의 징계를 통하여 준비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뛰어난 총애를 받기에 알맞는 상태로 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충만하게 나타날 수 있기 위해서 그렇다.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머물러 있을 때는 그리스도의 은혜는 감춰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며 그의 능력과 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간의 교만하고 거친 마음이 낮아지고 순종하도록 변하는 것이 필요했다.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그는 더욱 자세하게 더럽고 독성있는 잡초들로 온통 덮혔던 곳들이 그리스도의 은혜의 결과, 그의 능력이 그들의 생명을 회복하게 된 것을 묘사한다.  이 반복은 더욱 풍성하게 하려 함이다.  무성하게 피어라는 단어를 두 가지로 쓰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식물들의 자람이 시간적으로 길게 이어짐을 뜻할 수 있다. 마치 꽃들이 떨어지거나 말라서 피지 못하여 다시 곧 한 때 그랬듯이 나쁜 상태로 곧 돌아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계속 오래 피어나서 결코 지거나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뜻하거나혹은 많아지며, 매일, 매년 발전하는 것이 계속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는 이와 같이 우리 안에서 그의 은혜를 매일 풍요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온의 아름다움.”  이러한 은유는 이미 묘사한 비옥함을 더욱 완전하게 나타낸다.  선지자는 한때 우울한 황무지가 웃는 들판이 되었고 마른 땅이 꽃들의 아름다움으로 옷 입었다는 묘사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더욱 묘사하기를 레바논과 갈멜과 사론이 소유하고 있어 칭송 받는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갈멜은 경작되고 비옥한 땅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고유명사로 다른 두 이름과 같이 나온다.  우리는 다른 구절에서 보았다.  산들이 크게 칭송 받고, 모든 유대땅이 즐거움과 풍성한 과실로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앞에서 은유적으로 말한 것을 이제 비유 없이 명백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기까지, 그들에게는 열매도 없고, 아무 좋은 것도 없다. 우리의 비옥함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시작된다.  그것은 우리가 내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됨이 없이는 다다를 수 없다.  선지자는 우리 마음을 더 높은 경지로 끌어 올리려고 함에 틀림없다.  즉 우리가 하늘의 복이 풍성하여 흘러 넘쳐나는 것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빵과 포도주, 그리고 비슷한 것들로 만족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으신 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악하여 지며, 풍성함을 누릴수록 더 자주 눈이 멀고 더욱 사나워 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나타내실 때,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광과 아름다우심을 바라보게 하실 때, 우리는 그의 축복을 소유할 뿐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그들을 진정 즐거워하게 하신다.


 


3.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우리는 이 구절을 일반적으로, 그가 마치 약한 손을 가진 자들은 스스로 강하게 하며, 무릎이 떨리는 자들은 바로 서며 그들의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다음 구절을 볼 때, 이 말씀 전체는 말씀 사역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곧 교회의 선생들은 마음이 상한 약한 자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로 견고하고 기쁘게 만들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 권면은 때 맞추어 나왔으니,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강한 마음을 가진 자들까지도 놀라고 두려움으로 가득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곤경에 항상 약해지며,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전쟁을 선포하시면, 떨지 않을 자가 누구인가? 그러나 선지자는 마음에 근심하여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 이어서 나오는 말씀처럼 살아나라고 명한다.


 


4.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가 말씀하신 힘을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불어 넣어 주신다.  이는 오직 믿음으로 너희가 섰느니라 (고후 1:24) 그리고 살아라.  그러므로 그는 앞으로 올 은혜의 약속을 덧붙인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먼저 주목할 것은 하나님은 그의 은혜가 감추어져 있어, 알려지지 않기를 원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선포되고 나누어지기를 바라시며, 힘들고 떨린 자들이 침착하고 그 마음을 새롭게 하기를 권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무거운 고통이 있을 때 우리 마음이 더욱 용기를 얻을 수 있다. 만약 주님의 말씀으로 격려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절망하고 낙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넘어진 자들을 일으키고, 약한 자들을 강하게 하며, 비틀거리는 자들을 붙들어 주는 것이 말씀 선생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우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비틀거리는 무릎에 힘을 주는 말씀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또한 주목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힘을 전하는 강력한 도구가 아니었다면,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우리 귀에만 들리게 하고 우리 마음을 꿰뚫지 못했다면, 그 말씀들은 헛되이 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 이 역할을 말씀에 주셔서, 능력을 부어 주시고, 헛되이 말하지 않게 하시며, 내적으로 우리 마음을 감동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방법으로 성령의 은밀한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기뻐하시는 뜻대로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말씀이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하게 만든다는 것을 추론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게으르고 멍청했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감각이 닫히고, 우리는 머뭇거릴 뿐 아니라 불신으로 일절 망연자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께로부터 도움을 받아서 우리의 두려움을 떨려버리고, 우리의 약함을 치유받아 명민하게 살아 나갈 수 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이 경고는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져서 게으름을 물리치게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심을 깨닫는 순간, 사람은 두려움을 멈추거나,  적어도 지나친 공포를 이기게 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바울이 말했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립보서 4:5, 6.)


 


이 주제에 대하여, 우리는 미리 자세히 말했다.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이 말씀을 암시하면서, 피곤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선지자의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히브리서 12:3, 12.) 그러나 그는 이 말씀을 모든 믿는 자에게 말하여, 그들이 인내하도록 격려하는데, 이는 그들이 많은 어려움 중에 그들의 여정을 꾸준히 나아가게 하려 함이다.  너의 하나님이라고 덧붙히는 것이 필요치 않지 않은 것은 그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알지 못하면, 그의 가까움이 기쁨을 주는 원인이 되기 보다 오히려 공포를 자아낼 것이다. 하나님의 장엄하심보다 그의 은혜가 두려워하며 떠는 자들에게 육신의 교만을 낮추는데 더 합당하여 여기 언급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우리를 지키시는 이로, 그의 보호로 그들을 방패처럼 막아 주심을 말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만약 그가 원수를 갚으러 오실 때, 공포를 가져 오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 복수는 악한 자들과 교회의 원수들을 위함이다. 그 후자들에게는 그러므로 그가 공포가 될 것이나, 믿는 자들에게는 그가 위로가 되실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께서 그들을 구하러 오신다고 언급한다.  곧 명확하게 그가 오심은 우리의 구원을 위함이라고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 원수를 갚으심은 경건한 자들의 구원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복수를 위해서 무장하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이는 믿는 자들로 오직 그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천국에 다른 어떤 신이 도우러 올 것처럼 헛된 상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그가 오시리라하고 다시 반복하는 목적이다. 이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불신을 내어 쫓기 위함이다.


 


이 구절에서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여, 보복하시고 갚아 주시는 것이 특별히 하나님께속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믿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상하시는 분이시요, 진정으로 하나님 되심을 확신하게 돕는다.


 


5.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계속해서 선지자는 교회의 회복을 약속한다.  이는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용기를 주어, 그가 이미 말한 무서운 재앙에 의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사야가 말씀에서 전하는 의미를 알아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서만 우리가 다시 일어날 있고 천국의 삶을 소망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진정한 회복은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한다. 앞에서 이사야가 예고한 것은 (이사야 29:10) 유대인들의 끔찍한 눈멈과 미친 것과 영혼이 전적으로 백치같음에 대한 경고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께서 빛을 발하실 , 그들이 잃어버렸던 오감을 회복하고, 생명으로 빛날 것을 약속한다.  거기 나오는 “그 때”는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떠나 있을 우리는 벙어리요, 맹인이요, 절름발이라서, 모든 선을 행할 능력을 잃어 버린 자였는데,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서, 진정한 건강을 즐기게 되었음을 추론해야 한다. 


“혀”, “귀”, 그리고 “발”을 가지고 그는 우리 혼의 모든 기능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회복되기 전까지는 아무 선한 것도 얻을 없고 썩어빠진 것임을 뜻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전에는, 눈은 바른 것을 보지 못하고, 귀는 들을 없고, 발은 바른 길로 우리를 이끌 없다.  비록 인간의 오감이 매우 예리하지만, 죄로 인하여 망가졌고, 혀는 비방과 사기와 거짓과 모든 어리석은 말을 하는데 능란하며, 혼은 도적질하고 토색하고, 잔인한데 빠르며, 발은 상하게 하는데 신속하여, 한마디로, 우리 성품 전체가 악을 행하는 것을 기뻐할 아니라 강하며, 반대로, 선을 행하는 데는 게으르고, 지루해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기관은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다시 창조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르게 이해하고 느끼고 말하고 그의 기능을 감당하여야 한다. 이는 아래 말씀이 요약한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2:3.)


 


이렇게 새롭게 됨은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은혜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건전한 힘은 그리스도께 돌아온 자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들이 전에는 전혀 아무것에도 쓸모 없었고,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있었을 , 우리들은 선한 모든 것이 없어서, 전적으로 타락해 있었고,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적용할 없었고 반대로 모든 것이 오용되어, 오염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러한 증거와 예를 많이 보이셨는데, 그가 벙어리가 말하게 하고, 눈먼 자에게 눈을 회복시키며, 약한 자와 저는 자에게 완전한 힘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들의 몸에 주신 것은 그가 우리의 영혼에 부어주신 풍요하고 뛰어난 축복의 표지에 지나지 않았다.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것이며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그는 다음으로 다른 축복들을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면, 믿는 자들에게  넘치도록 공급될 것이었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면, 완전한 행복이 그로부터 흘러나와서,  부족한 것이나 모자라는 것이 있을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그가 행복을 우리에게 전할 은유적 표현을 쓰고 있다. 첫째, 그는 “물이 솟겠고”라고 한다. 이는 전에 황폐했던 곳에 최상의 비옥함이 발견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가난하고 척박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만, 아버지의 축복을 그와 함께 가져 오셔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은 좋은 것들을 자주 무척 많이 가지나, 그들의 부는 비참하다.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께서만 모든 축복의 풍성함을 진정하고 유익하도록 넘치도록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저주를 삼키면서 동시에 우리가 포도주와 음식이 풍성한 것보다, 차라리 죽음이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일어나실 , 강들과 물들이 흘러가며, 진정하고 값어치 있는 유익을 맺을 것이다.


 


7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것이며” 선지자는 앞의 말씀을 확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을 부요하게 하려고 오실 것이라고 한다.


물이 “메마른 땅”에서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는 방금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일어난 변화가 공개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어도, 선지자가 우리에게 행복한 삶의 그림을 그려서 우리에게 말했던 말이다.


그러나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지구는 열매가 풍성할 것을 보여주었다. 이는 그리스도 없이는 모든 것이 저주 받았다고 그가 이미 말했기 때문이다.  


 


“승냥이의 눕던 곳에. 세상이 메마른 황무지와 닮을 것이다.  거기에 사자나 승냥이나 야생동물들이 우르릉거릴 것인 이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지기 전까지이다.  한편,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시면, 경건한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예를 들면, 주께서 그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데려 나오실 ,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예언이 완성되었음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들의 파괴된 형편이 수리되고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원은 그것을 부족하지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약속의 완전한 성취는 현재의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소망가운데 축복받았기 때문이다 (로마서 8:24).  우리의 행복은 부분적으로 감추어져 있는데, 마지막 날까지 소망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래서 맛을 조금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는 우리가 완전한 행복을 더욱 열심히 갈망하여야 함을 뜻한다.


 


8. “거기에 대로가 있어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 대로가 있어” 여기서 말씀은 유대인들을 위한 약속이다.  그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있게 허락하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 갔을 , 그들은 그들이 영원히 추방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선지자에게 훨씬 멀리 바라보게 한다.  전에 황폐하였던 곳이 풍성한 양식으로 넘치고, 아무도 전에 살지 않던 곳이 여행자들과 거주민들로 사람이 넘쳐날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마디로 유대 전역은 다른 나라들과 화평과 조화를 이루며, 사람들이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두려움이 없이 왕래하게 것이다.  이제 유대인들은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하며 그들의 땅이 다시 회복되어 곳에 것이다.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선지자가 “그 길은 거룩하리라”함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헤아릴 없는 악독과 부패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땅을 오염시키고 서로간에 전염으로 서로를 병들게 만드는 외에 무엇이 남아있는가?  선지자는 그러므로 땅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새롭게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땅을 성화시킨다. 전에는 오염으로 부패한 것에 익숙한 곳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잠시 말한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유대인들은 길이 거룩하게 것이고,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것이며, 그들은 거룩한 모양으로 그들의 구속자를 예배할 것이다.  마치 땅이 나쁜 사람들로 모인 수치스러운 폭도로부터 깨끗하게 것임을 말하는 것처럼, 곳에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예배하는 자들이 거주하게 것이다.


 


“우매한 행인은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어리석은 자들은 다니지 못할 것이라고 충분히 이제 설명한다.  오염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위하심으로, 구별해 놓은 땅을 밟지 못할 것이다. 마치 그가 주께서 불신자들과 믿는 자들이 썩이지 않도록 주께서 떼어 놓으실 것이라고 말하는 같이 말이다.  이것은 교회의 가장 값진 축복 하나로 여겨져야 한다.  그러나 생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비웃는 자들과 위선자들이 교회 안으로 분별없이 뛰어 들어와서, 거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혜가 확실하게 보여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여러 방법을 사용하셔서, 그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청결하게 하심은 마지막 날에 기대해야 것이다. 하나님의 예배자라고 해도,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많은 불결함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성화되어도, 그들의 거룩함은 완전할 없다.  그들의 육신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다만 성령을 따르도록 낮추어지고, 절제하게 것이다. 이제, 주께서 그들 안에 다스리고 계시니, 그들의 자연적 성품을 순종하게 만드시어, 그들 안에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인하여 그들은 성도라고 불린다.


 


“그가 길을 이끄는 자가 것이라. (한국어 번역에는 나오지 않는 문구이다). 문단은 주석가들에 의해서 많이


왜곡되고 있으나, 칼빈은 타당성있게 문장 속의 그는 하나님을 가르킨다고 이해한다. 문맥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가시며 백성을 인도하지 않으신다면 길이 뚫린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지자는 그러므로 헤아릴 없는 사랑을 찬양한다.  그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나아가신다고 내어 보이면서 그렇게 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길을 가르쳐 보이지 않으신다면, 우리 발은 항상 잘못 가게 것이다.  우리는 헛된 것을 전적으로 따라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길이 가까울지라도, 우리 눈에 평탄할지라도, 우리가 걷기 시작하면, 우리의 어리석음으로 오른 쪽이나 쪽으로 바로 치우실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우리가 그릇 위험이 없음을 보인다.  이는 하나님께서 역할을 하시려고 낮추셨기 때문이다. 그는 아마도 역사에서 구속을 암시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도하셨기 때문이다.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 13:21)  


 


동시에 그는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지적하고, 곧장 어리석음은 우리의 몫임을 다음 구절로 보여준다.


 


“어리석은 자들은 그릇 가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들의 눈에 지혜로워서 그들 자신의 인도를 의지하나, 그들은 하나님의 내어버리심을 받아 불확실한 길로 방황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 주시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이 필요함을 우리가 알기 원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가장 뛰어난 상을 주시는데,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비록 그들이 전에 어떤 지혜를 소유했을지라도, 이상 그릇 가는 위험에 빠지지 않게 하심이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것이 믿는 자들이 주께서 손으로 그들을 붙드신 , 믿는 자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이 주님께서 그들의 인도자가 되시기 이전에 그들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


 


9.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그는 하나님의 하나의 사랑을 말하는데,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지라도, 모든 무서운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심이다.  전에는 그가 야생동물들이 유대인들이 어디로 가든지 만났음을 하나님의 저주들 가운데 하나로 언급했지만 (이사야 34:14), 이제 그는 그들이 은총을 입은 자로 받아들여져서, 사자나 맹수가 그들을 먹이삼아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주께서 그들을 지키시면서 길을 열어 놓으셔서 모든 위험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실 것이다.  비록 그들은 돌아갈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도 그들은 많은 장애를 겪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께서 모든 힘들게 하는 것과 방해하는 것을 치우실 것을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유익한 가르침을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 우리의 구원에 대한 일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이루신다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그의 은혜는 소용없고 이익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길을 여시고, 길을 포장하시고, 각종 장애물을 제거하시고, 자신이 지도자가 되셔서 모든 여정에 인도자가 되신다. 마디로, 우리를 향한 그의 은혜는 마침내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영역에 적용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길을 걷듯이 복된 상속을 향하여 전진하여 나아가야 한다.  사탄은 각종 장애물을 제시하고 위험으로 우리를 사방에서 둘러싸지만, 주께서 우리 앞에 가시고 우리 손을 잡고 이끄시며, 우리를 도중에 떠나지 않으시며, 마침내 그의 영으로 시작하신 일을 완전히 끝내게 하신다 ( 1:6).  그러나 맹수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길들여져서 우리에게 진노하거나 잔인하게 못하도록 하신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말씀하신 바와 같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호세아 2:18)  


 


 


10.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선지자는 전의 가르침을 확증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로 작정하셨고, 그의 결정을 반대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말이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신 자”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그의 능력을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인간적 방법으로 약속을 그가 해서 그들을 돌아오게 것이 아님을 알게 것이다.  그는 그래서 말한다.


그들이 시온에 오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바벨론에서 헛되이 데리고 나오지 아니하셨고, 그들을 여정을 시작할 떠나지 않으셨다.  동시에 주목할 것은 우리가 교회를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구속 밖에 없다는 것이다. 고대 사람들처럼, 일반적으로 우리 앞에 제시된 것은, 우리가 어떤 사람도 우리가 모두 사로잡힌 마귀의 폭압으로부터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앞서 가실 때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스스로 구속할 없다.  이제 구속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 특이한 선물이기 때문에, 그분 홀로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이는 아래 선포하는 것이 증거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8:36).


 


그러나 우리가 구속 받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계획하신 바는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니 우리는 우리의 힘을 다하여 힘써 지속적으로 목표하신 바를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교회에 들어가기 위하여 (이는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속에 영접받았는데), 우리는 여정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고 물으면서 칼빈은 답한다.  선지자가 비유적으로 삶의 모든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하나님의 구속 받은 자들”이 “시온에 가는 것”을 말하는데, 삶의 여정이 담겨 있고, 그를 통해서 축복된 삶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진보를 할수록, 교회에 가까이 연합할수록, 우리는 시온에 더욱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단어들,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는 너무도 행복이 있을 것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할 넘치는 이유를 가지게 것이다.  참으로 진실하고 유일한 기쁨의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것을 아는 것이다.  그의 은총이 우리의 완전한 행복을 위하여 충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환란가운데서도 영광스러워하는 것이다” (로마서 5:3).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밝혀 주시 않으실 , 우리는 슬픔으로 어두움에 잡힌다.  더욱,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지 않고서는, 합당하게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적 기쁨은 경건하지 않는 사람들이 탐닉하는 일반적 기쁨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는 믿지 않는 자들도 기뻐하는데, 그들의 마지막은 육신의 방탕으로 인하여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마침내 그들의 결말이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데 그들이 기쁨을 누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공의롭게 (로마서 14:17; 갈라디아서 5:22) 말하는 “기쁨”은 명예, 부동산, , 그리고 자연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다른 없어지는 것들에 의지하지 않는다. 기쁨은 은밀하고, 마음에 자리 잡고 있으며, 비록 사탄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를 흔들고 괴롭힐지라도, 그것으로부터 흔들리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도 분리되지 않는다.  그래서 선지자는 정당하게 덧붙힌다.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이기쁨은 영원한 것이요, 그리고 모든 슬픔은 달아날 것이다. 비록 많은 쓰라린 슬픔을 매일 하나님의 자녀들은 견뎌야 하지만, 그들이 받는 위로의 힘과 능력은 이렇게 것이다.  그래서 모든 슬픔을 삼켜 버리고 남는다.  “우리는 영광스러워 하도다”라고 바울은 말한다. “우리의 환란가운데서” (로마서 5:3). 그리고 이와 같은 영광스러워함은 기쁨이 동반한다.  선지자는


“사도들은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사도행전 5:41).


 


그러나 경건한 자는 때때로 무거운 고난가운데 고통한다. 그리고 슬픔도 면제받지 못한다.  이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놀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바로 보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으로 승리하고, 마치 높은 산에 오른 자가 태양을 바라보며 밝은 빛을 즐거워하듯이, 낮은 계곡에 있어서, 밝은 빛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하는 구름과 흑암에 둘러싸여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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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칼빈의 이사야서 35 주석을 번역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실 회복의 축복이 대한민국, 남북한의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게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칼빈의 주석이 값진 것은, 구약을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신약을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로 이해하여,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중심으로 신구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35장의 놀라운 영광을 이미 도래하였고, 부활의 몸을 입을 온전히 누리게 그리스도의 왕국의 아름다움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확실하게 뜻을 깨달아 기쁨으로 영생을 살며 천국을 간절히 소망하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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