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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설교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마태복음 16:20-28

절제회 | 2018.07.30 12:31 | 조회 3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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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기
마태복음 16:20-28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이르시다(막 8:31-9:1; 눅 9:22-27)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7)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미래에 받으실 그의 영광의 증거를 보여주신 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가 고난 받아야 하실 것과 그들도 십자가를 져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이는 그들이 연단을 받아야 할 때가 가까이 왔는데, 만약 그들이 새로운 용기로 무장하지 못하면, 그들은 모두 역부족임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통치를 반드시 시작하실 것인데, 그것은 현란한 모습이나 부의 광대함이나, 세상의 큰 박수 속에서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으로 시작하는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이해에 대한 반격을 뛰어넘는 것은 가장 어려운 것이다.  특히 만약 주님에 대하여 그들이 확신하며 품는 의견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다.  이는 그들을 위하여 땅의 행복을 가져다 줄 분으로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근거 없는 기대를 꽉 붙들고 그리스도께서 갑자가 그의 통치의 영광을 나타낼 그 시간만을 그들은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의 수치를 예고 받는 것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명예를 받지 않는 어떤 환경에도 놓여지는 것은 전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의 다스리는 자로써, 그가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 당하여야 한다는 것은 괴로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신 이 꾸중은 매우 필요 적절한 것이었다고 기꺼이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십자가에 대한 필요한 언급만 한다면, 무거운 고통을 그들의 약한 마음에 줄 수 밖에 없을 것임을 아시기에, 그리스도께서는 당장 사흘만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확실히, 십자가에는 육신의 연약함 밖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이 밝히 빛나는 그의 부활에 우리가 가기까지, 우리 믿음은 어떤 격려나 후원도 찾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설교가 이익을 주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설교자들은 그의 부활의 영광을 그의 죽으심의 수치스러움과 항상 연결시켜서 전하도록 극도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그러한 직분에 임명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의 증거를 왜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셨는가 자연스럽게 의아해 할 수 밖에 없다.  왜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에 의지하여 구속의 전령사로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가? 만약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하여 준 설명들을 우리가 마음에 간직한다면, 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다. 첫째, 그들은 그리스도께 충만하고 확실한 증거를 하도록 목적을 가지고 선생으로 지명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주님을 위해서 제자로 부르심받은 자들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게으름에 짓눌린 자들로서, 가르침 받을 만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자들로 만들어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그들의 부르심은 시한적이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설교하기 시작하시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의 죽으실 시간이 이제 다가 왔을 때, 그들은 아직 그들의 믿음을 증거하기에 충분히 준비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로, 믿음에 너무 연약했다.  그래서 그들의 고백은 조롱거리가 될 뿐이어서, 다른 사람들이 그가 죽음을 이긴 자로 인정할 때까지, 그리고 그가 그들을 충분히 견고하게 세워주실 때까지, 주님은 그들이 잠잠하라고 명령했다.

마태복음 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지나친 열정의 증거이다.  그는 그의 주님을 야단치고 있다.  비록 그가 그를 향해 가진 존경심 때문에, 그를 한 쪽으로 끌고 갔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차마 그를 꾸중할 엄두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마치 그리스도께서 신중함이나 자기 자제력이 부족한 것처럼, 그가 우리 주님께 충고해서 그를 지키겠다고 한 것은 베드로에 있어서 매우 주제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들의 환상을 좇아서 서두르면서 한쪽으로 치우쳐 달려가며, 사려 없는 열정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데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로, 나라의 구속주가 되어야 할 분이, 장로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는다는 것과, 생명의 주가 되신 분이 정죄 받아 죽으신다는 것을, 베드로는 어리석다고 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죽음에 노출되지 않도록 제어하려고 한다.  그의 사고는 타당한 것이나,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변명할지라도, 그의 열정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견을 더 크게 존중하며 주저 없이 따라 가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는 교만이 하도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서, 그들은 자기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 하나님께서 순응하시지 않으시면, 그들에게 불의를 행하셨다고 불평한다. 교황주의자들이 그들의 헌신들을 자랑하는데, 우리가 볼 때 그것은 완고함일 뿐이다! 그러나 그들은 덤벼드는 태도로 자화자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가장 큰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다고 믿는 것을 거부하실 뿐 아니라, 그 어리석음과 악함에 대하여 엄한 징계를 선포하신다.  확실하게 만약, 육신의 감정과 판단이 용납된다면, 베드로의 의도는 경건하고, 적어도 보기에 좋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보다 더 할 수 없는 거칠고 비웃는 언어로 그의 견책을 전달하셨다.
칼빈은 자문한다.  그러한 근엄한 대답의 의미는 무엇인가?  모든 경우에 그렇게 온유하게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려고 주의하시는 (이사야 42:3)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제자를 향해서 어떻게 그렇게 무섭게 분노를 천둥 치듯 터뜨리실 수 있으신가? 이유는 분명하다.  이는 한 사람의 인격 속에 그가 의도했던 것은,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의 열망을 만족시키려는 것을 억제 하도록 의도하신 것이었다.  비록 육신의 욕망은, 마치 그들이 야생 동물인양, 억제 되기가 쉽지 않지만, 그러나 육신의 지혜처럼 진노가 가득한 동물은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그렇게 예리하게 책망하시며, 그것을 또한 꺾으시는 이유이다.  마치 쇠망치로 하심 같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만 우리는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시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어떤 사람들은 뒤로라는 단어에 대하여 게으르게 추측한다. 마치 베드로가 뒤로 물러가라고 듣지 않고, 뒤따라 오라고 명령 받은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이미 살펴 보았던 말씀에서, 누가는 (4:8) 우리에게 우리 주님은 그 단어들을 사탄을 물리치는데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동사 ὕπαγε (휘파게, 마태복음 16:23) 는 물러가라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그의 제자에게 그로부터 거리를 두라고 내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사려 없는 열정으로 말미암아, 그는 사탄의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단순히 대적하는 자라고 부르지 않고, 가장 미워한다는 표현을 써서 마귀의 이름을 그에게 주신 것이다.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우리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를 그로부터 멀리 보내시는 이유로 이 대목을 주목해야 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반대함으로, 그는 그리스도께 죄를 범한 것이었다. 이는 베드로가 주님의 가시는 길을 멈추려고 했을 때, 그 자신과 온 인류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그가 빼앗아 가지는 않았다. 이는 그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을 마땅히 피하기 위해서 어떤 주의를 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가 베드로가 좋아하는 것들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악의 근원을 열어 보이신다. 우리와 우리의 의도들이 우리 하늘 재판관에 의해서 마귀에게 속한 것이라고 버려지지 않도록,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점에 너무 붙잡혀 있지 않는 것을 배우고,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순종하며 품도록 배워야 한다. 교황주의자들로 이제 하늘을 향해서 자기들의 개념들을 극찬하라고 하라.  어느 날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타날 때, 그들의 자랑하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사탄으로부터 왔다고 선포하시는 것을 그들은 배울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는 우리가 스스로 치명적 장애물에 의해서 구원의 길로부터 우리 자신들을 닫으려고 결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외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 지혜롭게 되려고 소원하지 말자.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베드로가 십자가를 두려워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이 영향을 받음을 그리스도께서 보시고,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하여 일반적 담론을 하시는데, 열 두 제자들에 그의 연설을 국한하지 않으시고, 모든 경건한 자들을 위하여 같은 원칙을 제시하신다.  마태복음 10:38에서도 거의 같은 말씀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씀에서 사도들은 그들이 사역을 시작하자 말자, 핍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단지 상기시켜 주셨을 뿐이었다. 일반적 가르침이 여기 전달되면서,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자들에게 기초되는 가르침들을 심어주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이 말씀들은 베드로의 잘못된 관점들을 부인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었다.  자기 스스로를 모든 사람에게 자기 부인과 인내의 모범으로 제시하시면서, 그는 먼저 베드로가 생각한 것이 그의 성품과는 불일치한 것을 그가 인내하는 것이 필요하였음을 보인다. 그 다음으로 그는 그의 몸의 모든 지체들이 그를 닮기를 요청한다.  그 단어들은 이렇게 설명되어야만 한다.  “만약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기 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그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혹은, 그는 나의 모범에 자신을 일치시켜라.”  그 뜻은 그들이 그의 진실한 모방가가 되지 않고, 같은 여정을 기쁘게 따라 오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여겨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를 닮기를 원하심으로, 중요한 요점에 우리가 익숙해 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우리가 닮아가도록 돕는 간단한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자기 부인과 자발적 십자가 지기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부인은 매우 폭이 넓고 함축하는 뜻은 아래와 같다.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 안에 다스리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 성향들을 마땅히 버려야 하고, 육신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마땅히 떠나며, 우리가 동의하는 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인정해야 한다. 얼마나 눈 먹은 사랑으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을 사랑하며,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들에게 기울어져 있고, 얼마나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는지 우리는 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면,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격려하는 어리석음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전서 3:18). 그 다음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애착을 다스리며 진압시켜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께서 이 명령을 제시한다. 왜냐하면 비록 사람들의 생명은 공통된 비참함에 분별없이 종속되어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특별한 방법으로 단련하시는데, 그 목적은 그들이 그의 아들의 형상으로 닮아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법칙이 그들에게만 엄격하게 주어진 것이 아닌데 대해 놀랄 필요가 없다. 덧붙일 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짐을 선한 사람과 나쁜 사람 양쪽에 다 주셨지만, 그들이 기쁘게 그들의 어깨에 매지 않으면 그들은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말해지지 않는다.  이는 야생의 다루기 힘든 말이 비록 기수가 그 말을 끌고 가더라도, 그 기수를 받아들인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성도들의 인내는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즐겁게 진다는데 있다.  누가는 매일 그의 십자가를 지게 하라 라고 하여, 매일을 덧붙인다.  매일은 매우 강조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미하는 바가 우리의 전쟁에는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끝이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경건한 자의 훈련이 중단 없이 되게 함은, 많은 환란이 다 마칠 때, 그들이 새로운 환란을 인내하도록 준비되게 하려 함이다.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가장 합당한 위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즐겁게 죽음의 고난을 당하는 자들은 생명을 실제로 얻게 된다는 것이다.  마가는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서 죽는 동기가 이것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마태의 말씀도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자주 일어나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생명을 무시하는 야망이나 절망을 느낄 때, 용감하게 죽음을 맞이하는데, 거기에는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 위협하는 것은, 약속과 대조되면서, 그들이 뛰어드는 유일한 이익은 삶을 포기하는 것뿐이라고 상기시키신다. 현재의 삶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육신의 게으름을 떨쳐버릴 힘을 발휘하는 경향이 있으나, 자살에는 영원한 죽음만 있을 뿐이다.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목숨이라는 단어는 여기서 가장 엄격하게 쓰였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생각나게 하시는 것은 사람의 목숨은 몇 일 동안 이 세상을 즐기도록 창조된 것이 아니고, 마침내 천국에서 불멸을 얻도록 창조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강하게 애착을 가지고, 세상일에 전적으로 묶여서, 그들이 왜 태어났는지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멸의 목숨을 주셔서, 땅의 생명의 여정이 다 끝날 때, 그들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부주의하고 악랄한 어리석음인가!  참으로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목숨은 세상의 부나 향락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신의 관점에 너무 눈이 어두워져서 다 알고도 고의적으로 그들의 목숨을 파멸로 내어 던진다.  세상은 그 유혹들로 우리를 환상에 젖게 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목숨의 더 뛰어난 가치를 기억하자. 이는 이것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할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땅의 행복의 헛된 상상을 쉽게 쫓아낼 것이다.

27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우리의 마음에 더 깊은 영향을 줄 가르침이 주어졌다.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눈 앞에 미래의 심판을 보여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 지나가는 삶의 가치 없음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천국의 삶의 관점에 깊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마음은 너무 게으르고 방만해서, 그것은 천국을 바라봄으로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심판대로 부르시고, 그들을 이끄셔서 그들이 때 맞추어 계시될, 복된 구속을 사모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을 가지지 말고 살도록 항상 묵상하게 하신다. 그 경고는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니, 곧 그들이 그들 자신의 삶에 신앙의 고백보다 더 높은 가치를 두지 않도록, 헛되이 힘쓰지 않게 하려 하심이다.  “너희 삶을 두려움 없이 내 손 안에, 그리고 나의 보호 아래에 놓으라. 비록 너희가 잠시 멸망 당한 것 같을지라도, 내가 마침내 너희를 신원할 자로 나타나, 너희를 온전히 회복시킬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말씀하신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라고 말씀하심은 그의 제자들을 현재 나타난 것들을 가지고 그의 나라에 대해서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함이다.  이는 지금까지는 그가 알려지지 않고 경멸 당하여, 종의 모양과 상태로 숨겨져 계셨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세상의 심판자로 나타나실 그 때는 매우 다를 것임을 그들에게 확신시키신다.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칼빈은 다른 구절에서 행함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 충분히 다루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간단히 다룬다.  선한 일에 대한 보상에 대해 약속하실 때, 그들의 공로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의와 대조된다.  그리고 선한 일은 우리의 구원의 이유로 지적되지 않는다. 단지, 믿는 자들에게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을 확신시켜줌으로, 기쁘게 목표를 두고 옳은 일을 할 수 있게 격려하려 하심이다. 그러므로 앞의 이 말씀은 우리는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받았다 (로마서 3:24)는 말씀과 완전히 일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총애하심으로 아무 공로 없이 받아 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에게 우리가 받기에 감당하지 못할 보상을 우리 일에 대하여 주시는 것이다.

2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자들이 아직도 머뭇거리며 그 날이 언제일지 물을 때, 우리 주님은 그가 그들에게 곧바로 미래의 영광의 증거를 주실 것이라는, 임박한 확신으로 그들을 생기가 나게 하신다. 우리가 보통 속담으로 아는 것은 기대하는 자에게는 빠른 속도도 지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들은 것보다 더 진실한 것은 없다. 한편 그의 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그들에게 확신을 주시려고 중간 기간을 보이신다.  이는 이렇게 말씀하심과 같다. “내가 오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 너무 길게 느껴지면, 이것을 대신하여 때맞추어 준비할 것이니, 너희들이 죽기 전에, 너희가 너희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는 내가 신뢰할 수 있는 소망으로 너희가 품으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말이다. 이는 어떤 사람들이 적용하기를, 그들은 요한에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 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에서 시작하셨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더욱 풍성하게 하셨으며, 기적들을 행하심으로 나타내신 천국의 영광으로 우리는 이해한다. 제자들은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심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계시와 시작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에게 천국의 새 맛을 보라고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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